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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인물들...6.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알렉산드르2세의 황후)

엘아라 2011. 7. 2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어쩌다보니 러시아 황후들 그림을 올리게 되는군요.

하는김에 그냥 해볼려고 합니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인물들...6.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알렉산드르2세의 황후)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는 헤센의 마리 대공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공식적 부모는 헤센의 대공인 루드비히 2세와 그의 부인인 바덴의 빌헬미네였죠. 하지만 전 유럽 궁정에서 그녀와 그녀의 오빠인 알렉산더가 대공의 아이가 아니라 대공비의 시종무관의 아이들이며 대공이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자녀로 인정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당시에 황태자로 신부감을 구하러 다니던 알렉산드르2세는 하루 다름슈타트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그곳에 머문 이유는 순전히 여정 중간에 다름슈타트가 있었고 그곳에 머무는것이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것보다 나아서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황태자는 대공의 열여섯살된 막내딸을 보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게 됩니다. 그는 그녀를 더 보기 위해 대공이 주최한 저녁식사에도 참여하는 열성을 보이고, 아버지에게 의중을 묻는 편지까지 보냈습니다.

 

니콜라이 1세 역시 마리 대공녀에 대한 소문을 알았지만,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결혼후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라는 정교회식 이름을 받았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교육을 잘받았으며 남편에게 순종적이며 시아버지에게 잘하고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는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합니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알렉산드르 2세에게 황위를 이을 아들을 무려 여섯명이나 낳아주었죠.

 

...하지만 황후가 죽어가던무렵에 알렉산드르2세는 "사실 내 진정한 사랑은 얘야"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예카테리나 돌고루카야 공녀였죠. 딸같은 그녀에게 반해서 황후가 죽지 않았음에도 "신앞에서 내 아내는 너다"라는 맹세까지 할정도였고, 죽어가는 황후에게 예카테리나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축복해달라고 하는 잔인한 행동까지 합니다.--;;;

 

그리고 황후가 죽자마자 황제는 예카테리나 공녀와 재혼합니다. 물론 황실내부에 큰 반발때문에 귀천상혼으로 했으며 예카테리나는 유리예프스카야 공비라는 칭호를 받았고 아이들도 모두 유리예프스키/유리예프스카야 가됩니다.

뭐 다섯번의 테러를 겪으면서 살아남은 황제가 언제 죽을지 몰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것은 이해가 되지만 솔직히 황후가 죽자마자 결혼한것은 황후의 자녀들에게 큰 충격이 아니었을까합니다. 어머니 죽은지 며칠됐다고 새파랗게 젊은 정부랑 홀라당 결혼해버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뭐랄까 많이 서운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황제는 황후가 죽은지 한달도 안돼서 귀천상혼했습니다.)

 

 

결혼하기전

 

 

1840년대 후반

크리스티나 로버트슨 작품

황후의 실물도 이와 매우 유사할것으로 추정되는데 왜냐면 다른 화가의 작품들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얼굴로 나오거든요. 특히 이작품이랑 빈터할터 그림이랑은 상당히 비슷하다죠.

 

 

 

1850년

 

1855년 이후

 

1856년

 

1857년

빈터할터의 그림

 

1857년 이후

 

언젠지 모르는 두점

여기서도 보시면 아시다시피 황후가 병약한 모습이 역력하죠

황후는 어린나이에 아이들을 너무 많이 낳아서 건강이 그다지 좋지 못했고 자주 요양을 갔습니다.

이때문에 남편인 알렉산드르2세는 궁정에서 연애질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언젠지 모르는 황후의 모습

상복을 입고 있는것으로 봐서 큰아들이 죽은후인 1865년 이후가 아닐까합니다.

황후와 황제 모두 큰아들의 죽음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닉사라는 애칭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젊은 황위계승자였습니다만 병사하죠. 이 타격으로 황후는 더욱더 종교에 몰입했고, 황제는 연애질에 집중합니다.--;;

 

1870년대 황후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황후의 사진

언젠지는 모르겠습니다.

 

1869년의 황후 사진

 

황제와 함께 있는 황후의 사진

1870년대로 생각됩니다.

 

 

황후의 남편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그는 다섯번의 폭탄테러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결국 여섯번째 폭탄테러로 사망합니다.

그는 죽기 직전 헌법을 승인하려했었는데 그가 죽음으로써 아들 알렉산드르3세는 보수정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라진스키는 자신의 책에서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은 러시아 황실의 운명을 결정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알렉산드르 2세가 죽지 않았다면 서유럽식 입헌군주제가 러시아에서도 정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듯합니다. (솔직히 과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황제가 암살당하므로써 입헌군주국이 될 가능성이 날라가버린것은 사실이죠.)

 

 

황제의 정부이자 두번째 부인

예카테리나 돌로루카야 공녀

유리예프스카야 공비

아버지가 일찍 죽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황제가 보호자가 됩니다만, 예카테리나가 성인이 되자 황제는 그녀에게 열렬히 구애합니다. 그녀는 처음에 황제를 거절했으나 집안의 강요와 계속되는 집요한 황제의 구애에 결국 황제의 정부가 됩니다. 러시아 궁정에서 그녀는 미움을 받았는데 특히 죽어가는 황후를 버림받게 만든 사람이라는 생각에 궁정여성들이 그녀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궁정조신중 한명은 "아내들이 없다면 유리예프스카야 공비가 좀더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을수도 있다"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