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베르나도트의 왕위 계승자 선출과정

엘아라 2010. 11. 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11월 5일은 프랑스의 장군이었던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으로 이민가서 정식으로 스웨덴의 왕태자 칼 요한이 되는 날입니다. 올해가 이민 200주년되는 해라죠.

스웨덴 왕실에서는 이를 기념해서 다양한 행사를 합니다. 더불어 프랑스에 있는 베르나도트 박물관에서도 기념행사를 하죠. 뭐 제가 프랑스나 스웨덴에 갈수 있는것도 아니니....-0-;;

 

어쨌든 원래 기념으로 전기를 다 읽어볼까했습니다만, 영어로 된 전기는 읽기가 힘들다죠.-0-;;

그래서 결국 어떻게 왕위계승자로 선출되었는가에 대해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왕위 계승자 선출 과정

 

1810년 6월 스웨덴으로 부터 소식하나가 전해진다. 스웨덴의 추정왕위계승자였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공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과 함께 스웨덴 국왕인 칼13세의 사절이었던 오토 뫼르네르 남작은 나폴레옹에게 국왕의 서신을 하나 전했다.  여기에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로 덴마크 국왕이나 죽은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의 형이 스웨덴 국왕이 되는것에 대해 프랑스의 의견을 묻는것이었다. 이 소식과 칼13세의 서신이 프랑스에 전해졌을때, 이 문제는 프랑스 궁정에서 크게 다루어질 문제는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와의 적대를 피하기 위해 북유럽 특히 스웨덴의 일에 관여하는것을 원치 않았으며, 덴마크는 나폴레옹의 우방이었기에 특별히 반대하거나 찬성할 이유가 없었다.

 

 

아우구스텐부르크의 칼

스웨덴의 추정왕위계승자

그가 죽은후 대중들은 구스타프 왕태자(구스타프4세 아돌프의 장남)을 지지하던 페르센 백작이 그를 살해했다고 여겼으며, 이때문에 그의 장례식날 군대의 방조하에 페르센 백작은 살해당합니다.

 

 

하지만 국왕의 편지를 전한후 뫼르네르 남작은 프랑스에 있던 스웨덴 장군이었던 브레데 백작을 통해 한명의 사람을 만난다. 바로 당시 면직당해서 파리의 살롱에서 노닥거리고 있던 베르나도트 장군이었다. 그는 스웨덴 내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어쩌면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위계승 후보자가 될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뫼르네르 남작이 베르나도트와 접촉한것은 스웨덴 정부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와 다른 동료들의 의지였다. 스웨덴 내에서는 러시아쪽의 올덴부르크 대공이나, 기백이 없는 덴마크쪽 왕족들을 왕위계승자로 원치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한때 잘나갔던 스웨덴은 이제 점점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으며, 스웨덴의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러시아의 한 귀족은 스웨덴에 대해서 "이제 평화롭게 사망할것이며 아무것도 남지 않을것이다"라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 이때문에 스웨덴 귀족들, 특히 장교들은 스웨덴의 영광의 시기였던 구스타프2세 아돌프 시절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인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보들은 바로 잘나가는 나폴레옹의 육군 원수들이었다. 이에 대한 감정은 광범위한것이었는데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이 사망했을때 페르센 백작(....네 마리 앙투아네트이야기에 나오는 그 악셀 페르센입니다.) 은 "이제 프랑스 육군 원수를 왕위계승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기회를 잃어버렸다."라고 할정도였다.

 

 

스웨덴의 구스타프2세 아돌프

스웨덴의 영광의 시대를 이끈 인물

스웨덴에서 "대왕"칭호가 붙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the great가 붙을 조건으로는 개혁정책과 군사업적 둘다가 필요한듯해요.)

 

뫼르네르 남작은 임무가 끝난후 개인자격으로 프랑스에 남았다. 그는 베르나도트와 접촉했고 그를 왕위계승자로 지지할 의사를 밝혔다. 북유럽쪽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나폴레옹의 육군원수가 바로 베르나도트였다. 그는 하노버와 헤센지방의 총독이었고, 이때 매우 잘 통치했었다. 그리고 후에 뤼벡에서 스웨덴 포로들을 사로잡았을때 포로들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대해줬다. 이런 영향으로 스웨덴 장교들 사이에서는 베르나도트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뫼르네르 남작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면서 베르나도트를 정한 이유중 하나가 그와 나폴레옹과의 관계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가까우면서도 먼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관계는 스웨덴이 독립을 유지하면서 스웨덴의 영광을 되찾게 해줄것이라 믿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다른 친척이나 원수들을 언급했는데 특히 외젠 드 보아르네에 대해서는 비록 그가 괜찮은 후보이긴 하지만 절대 스웨덴에 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외젠 드 보아르네 

스웨덴에서는 그 역시 괜찮은 왕위계승 후보자로 여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종하는것을 원치 않았으며 그는 당시 상태(이탈리아의 부왕이자, 프랑크푸르트 대공이 되던가...)에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의 부인인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는 정략결혼이었지만 남편을 사랑해서 끝까지 남편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1세는 사위를 위해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지위를 주죠.

외젠의 큰딸인 조제핀은 후에 베르나도트의 며느리가 됩니다.^^*

 

베르나도트는 뫼르네르 남작의 제안에 대해 신중히 생각했다. 친구였던 브레데 백작의 의견을 물었는데, 백작은 만약 베르나도트가 왕위 후보자가 된다면 뫼르네르가 적극적으로 지지할것이며, 큰 세력을 얻을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뫼르네르는 베르나도트에게 스웨덴 왕위계승자가 되기위해서는 세가지 조건이 부족하다고 조언했다. 종교문제와 언어 문제 그리고 나폴레옹과의 관계였다. 종교문제에 대해서 베르나도트는 "나는 앙리4세와 같은 지방 출신이고 앙리4세의 예를 따르면 되오"라고 했다. (아시죠 앙리4세가 위그노였는데 프랑스 국왕이 되면서 카톨릭으로 개종한것 말입니다.) 그리고 외가쪽으로 자신의 친척들은 위그노라고 덧붙였다. 언어 문제에 대해서는 할수있는한 최선을 다해 스웨덴어를 배우겠다고 했으며, 자신과 황제와의 관계는 예전과는 다르다고 언급했다.

 

 

칼 오토 뫼르네르 남작

그는 베르나도트를 왕위계승자로 만드는데 열정적으로 힘을 쏟았습니다.

 

 

뫼르네르는 베르나도트에게 자신이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그가 스웨덴 왕위계승자 후보가 되길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힘을 규합하겠다고 했으며, 이 사실에 대해서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에게 말하기를 원했다. 베르나도트는 브레데 백작과 상의한후 황제에게 이에 대해서 보고했다.

스웨덴 대사는 이에 대해서 매우 놀라는 눈치였으며, 그는 스톡홀름에 이에 대해서 보고했다. 이때문에 뫼르네르 남작은 스톡홀름에서 체포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베르나도트를 향해 계속해서 미소짓고 있었다.

 

이전까지 나폴레옹은 스웨덴 내정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스웨덴은 지리적으로 너무 고립되어있을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러시아와의 관계에 문제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웨덴 인들이 "프랑스 육군 원수"를 왕위계승자로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나폴레옹 역시 개입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자신 원수들과 친척들의 왕족 지위를 개편하고 싶어했다. 결국 프랑스 외교부와 스웨덴 대사는 접촉을 가졌고, 스웨덴인들의 열망을 알아챘다.

나폴레옹이 스웨덴 왕위계승자로 원한 사람은 처음에는 외젠 드 보아르네였다. 그당시 막 재혼했었던 나폴레옹은 여전히 외젠 드 보아르네를 아들로 사랑했으며,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으로 그가 계승자 지위에서 멀어진것을 보상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부인인 마리 루이즈가 왕위를 위해 신교로 개종한다는것은 말도 안된다고 이야기했고, 외젠역시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고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그에 대해서 베르나도트 외에 가장 유력한 후보로 생각했지만 그는 너무나 "온화하고 좋은 인물"이었기에 강한 스웨덴을 만드는것에 무리라고 여겼으며, 차라리 바이에른 왕가 출신인 아름다운 그의 부인이 왕비감으로는 더 적합하다고 여겼다.

외젠 말고도 의붓딸인 오르탕스의 자녀들을 위해 동생 루이를 스웨덴 왕으로 만드는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오르탕스의 자녀들 역시 제국의 계승자였지만, 마리 루이즈가 아들을 낳는다면 그 지위를 상실할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이 역시 문제가 있었고, 스웨덴에서는 고려조차 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

나폴레옹의 의붓딸

루이 보나파르트의 부인

나폴레옹3세의 어머니 

 

남편인 루이가 형인 나폴레옹에게 반항하는 캐릭터라면, 오르탕스는 시아주버니이자 의붓아버지였던 나폴레옹을 열렬히 지지하는 쪽이었습니다. 때문에 부부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0-;;;

 

 

나폴레옹은 자시의 가족들은 개종하는것이 힘들기에 스웨덴 왕위계승을 받아들일수 없지만, 자신의 육군 원수들은 가능할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절대 베르나도트는 언급하지 않았고 자신의 최측근들이었던 베르티에,마세나 등의 이름을 거론했으나 스웨덴에서는 베르나도트나 외젠 드 보아르네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스웨덴의 내정에 간섭하는것을 원치 않는다면서 마지 못해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 선출 후보자가 되는것에 동의하게 된다.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결혼식

 

 

나폴레옹의 마지못한 승락이 있은후, 베르나도트는 정식으로 왕위계승후보자로 선거 운동을 했다. 그는 하노버 총독시절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연락을 했으며 그중 한명에게 선전요원의 임무를 주었다. 그는 유능한 상인으로 북유럽에 많은 친구가 있었다. 그는 베르나도트 부부와 그의 "잘생긴 아들" 오스칼의 초상화를 그려서 마구 뿌리고 다녔으며, 베르나도트가 얼마나 부자이며, 왕국에 큰 부를 가져다 줄수 있다고 선전했다. 특히 아버지의 칼을 가지고 노는 어린 오스킬 베르나도트의 모습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오스칼 베르나도트

후에 스웨덴의 오스카르1세

그는 매우 빠르게 스웨덴어를 습득했으며, 후에 언어로 고생하는 아버지의 통역이 되었습니다.

잘생긴 외모에 자유주의자여서 인기가 대단했다고 합니다만, 결혼생활에서도 자유주의를 도입하는 바람에 부인인 요세피나 왕비가 피눈물 흘렸댑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반응을 걱정했으며, 이에 혹시나 프랑스 대사가 스웨덴에 있다면 자신이 프랑스 육군 원수를 왕위계승자로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대사를 프랑스로 소환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선거 결과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로 선출되었다. 그를 왕위계승자로 받아들이는데 남은 유일한 장애는 바로 스웨덴의 국왕부부가 된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가 되면서 칼 요한 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는 프랑스에서 이미 스웨덴 왕위계승자로써 행동을 했으며, 황제가 연 가족 모임에 스웨덴 군복을 입고 가기도 했다.

 

베르나도트가 떠나기전 나폴레옹은 어느날 꿈을 꿨다고 한다. 두척의 배가 바다에 있었는데 하나는 자신의 배였고 다른 하나는 베르나도트의 배였다고 한다. 그리고 베르나도트의 배는 다른방향으로 떠나고 자신의 배만 폭풍우속에 있었다고 한다. 베르나도트가 떠난후 나폴레옹은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너무나 몰랐다. 그는 그의 취향이 있었고, 나는 나의 취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위계승자로 선출된것은 나폴레옹 시대의 최고의 경이로운 일이었다. 유능한 인물이 승진하고 많은 군인들이 나폴레옹의 의지로 왕족이 되었던 시대에, 나폴레옹의 의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경력과 운으로 왕족이 된 사례였기때문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나폴레옹 시대에 가장 출세한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과 마찰을 빚던 베르나도트였다.

 

1810년 11월 5일 프랑스의 육군 원수였으며, 퐁테 코르보 공이었던 베르나도트 장군은 스웨덴 의회에서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 칼 요한으로 승인받았다.

 

 

 

스웨덴의 왕태자 칼 요한

전 프랑스의 베르나도트 장군

 

 

자료출처

Bernadotte and Napoleon 1763-1810 (sir D.P.Batton,1921)

그림출처

1.자료출처와 동일(오스카르1세 초상화)

2.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