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비스보리의 백작에 대해서 약간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순전히 폴케 베르나도테때문입니다.
그는 오스카르2세의 손자였는데, 의외로 한일이 많더라구요.
스웨덴 왕족들 이야기를 보면 대부분 예술에 관심이 많고, 의무때문에 군 복무를 하긴 했지만, 예술이나 저서를 집필하는등의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사는 경향이 대부분이더라구요. (아시다시피 스웨덴에는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주로 정치한다고 하니...이런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아하하..)
자료를 찾다보면 폴케 베르나도테에 대해서 많이 나와서 누구지..라고 생각했었는데, 노벨상 수상자 이야기중 랄프 번치 이야기를 보다가 폴케 베르나도테에 대해서 나오더라구요. 폴케 베르나도테를 어디서 많이 봤는데..라고 생각했었는데 현 스웨덴 국왕님 세례식때 나오던 분중 하나더라구요.
그래서 잠깐 찾아봤습니다만, 테러로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아마 랄프 번치 대신 노벨 평화상을 수상받았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
비스보리의 백작
스웨덴의 오스카르2세의 손자
Folke Bernadotte,Greve af Wisborg
(2 January 1895 – 17 September 1948)
스웨덴의 오스카르2세의 둘째 아들인 오스카르 왕자는 형수인 바덴의 빅토리아의 시녀중 한명이었던 풀키라의 에바 문크(Ebba Munck af Fulkila)와 사랑에 빠졌다. 그때까지도 스웨덴 왕실은 다른 유럽 왕가들에 비해서 정통성이 약했기에 그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해서 왕족들에게 매우 엄격한 귀천상혼제를 적용하고 있었다. 오스카르2세는 아들을 설득하려고 2년이나 둘의 관계를 생각해보라고 권했지만, 결국 오스카르왕자는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사랑을 택했다. 왕실 가족들은 오스카르왕자의 결혼을 지지하긴했지만, 오스카르2세는 다른 아들들(칼,유셴)에게 귀천상혼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오스카르 왕자는 결혼후에도 프린스 오스카르 베르나도테라고 불렸고, 부인 역시 프린세산 에바 베르나도테로 불렸다. 하지만 그것은 국왕의 아들과 며느리라는 신분에 맞춰서 예우를 해준것었을뿐, 자녀들에게 상속되는 칭호는 아니었다. 이때문에 오스카르 왕자는 외삼촌인 룩셈부르크 대공(오스카르의 어머니 소피아 왕비는 나사우 공작가문 출신으로 오빠인 아돌프는 룩셈부르크 대공이 됩니다.)에게서 비스보리 백작 칭호를 받았다. 이후 오스카르 왕자의 자녀들은 모두 비스보리 백작/백작영애를 불렸는데 이 자녀들중 막내가 바로 폴케 베르나도테였다.
오스카르2세때의 스웨덴 왕실 가족들
맨 왼쪽 두사람이 폴케 베르나도테의 부모인 오스카르 왕자와 에바 왕자비입니다.
뒷줄 왼쪽에서
오스카르 왕자 부부. 칼왕자(오스카르2세의 셋째아들,벨기에의 아스트리드 왕비,노르웨이 매르타 왕자비의 아버지).빌헬름왕자(구스타프5세의 둘째아들).구스타프6세 아돌프,구스타프5세,바덴의 빅토리아(구스타프5세의 왕비),유셴왕자(오스카르2세의 막내아들)
앞줄 왼쪽에서
덴마크의 잉에보리(칼왕자비,아기는 큰딸인 마르가레타),작센-알텐부르크의 테레시아(오스카르2세의 숙모,오스카르1세의 막내며느리),나사우의 소피아(오스카르2세의 왕비). 에릭왕자(구스타프5세의 막내아들)
폴케 베르나도테의 부모
오스카르 왕자와 에바 베르나도테
비록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긴했지만, 오스카르 왕자의 가족들은 왕실가족으로 인정받았고, 늘 왕실관련행사에 참여했다. 폴케 베르나토테 역시 왕실가족들 사진에 자주 얼굴이 나오며, 왕실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학교를 다녔으며,다른 왕족들처럼 스웨덴군에 입대했다. 폴케 베르나도테는 스웨덴 기병대에 입대했으며 1918년 장교가 되었으며 지위는 소령에 이르게 된다. 그는 평생 스웨덴에서 보이스카웃을 조직하고 활성화하는데 힘썼는데, 2차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보이스카웃이 의료지원등을 할수있도록 조직했다. 그리고 적십자사 부총재가 된다.
2차대전중 스웨덴 적십자사 요원들
폴케 베르나도테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바로 포로교환문제에서였다. 1943년부터 스웨덴 적십자사 부총재로 있었던 폴케 베르나도테는 1943년과 1944년 사이에 있었던 포로교환문제에 관여하게 된다. 만명이 넘는 포로가 스위스에서 교환되었으며 이를 중재하게 된것이다. 1945년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포로들을 구출하는 역할도 맡게 된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한 중재역할을 자처했다. 처음에는 덴마크가 시작한 이 일이 난항을 겪자,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였던 스웨덴이 개입한것이었다. (이때까지도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여파가 있었을듯합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폴케 베르나도테를 대연합군 협상창구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는 반대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것이었다.
1943년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과 함께 있는 폴케 베르나도테
독일은 스칸디나비아 포로들을 스웨덴으로 이동시키는것에 합의했지만, 연료외에는 어떤것도 지원하길 거부했다. (...지원할 여력이 있었으면 차라리 전선에 보급을 더했겠죠.) 연료를 제외한 모든것들은 스칸디나비아쪽에서 제공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폭격이 문제였다. 대량의 이동은 폭격의 대상이 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때문에 이동 차량은 흰색의 엠뷸런스가 주가 되었다. 이것은 후에 "White Buses"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처음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 국민들을 구출하는것이 목적이었지만, 후에는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을 구출하는데도 이용되었다. 모두 21000명이 구출되었으며,덴마크와 노르웨이인들 외에도 프랑스인과 폴란드인,유대인과 독일인도 포함되어있었다.
(이 White Buses 계획은 대체로 2차대전중 스웨덴의 인도주의적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여러가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폴케 베르나토테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의견들이 좀 있는데, 그중에는 폴케 베르나도테가 유대인들을 구하는것을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 시각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듯합니다.^^*)
White Buses
2차대전이 끝난후인 1948년 폴케 베르나도테는 UN의 중재자로 팔레스타인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는 유엔의 첫번째 공식 중재자였다. 영국의 지지와 UN의 결의를 통해 이스라엘의 건국이 결정되고, 이때문에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해 중립국인 스웨덴 출신의 폴케 베르나도테가 중재자가 되었으며 그의 참모장으로 동행한 인물이 미국인이었던 랄프 존슨 번치였다.
하지만 그해 가을 폴케 베르나도테는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사망했다. 폴케 베르나토테의 중재안에 불만을 품었던 시오니즘 유대인 테러단체였던 Lehi는 폴케 베르나도테와 그의 일행들이 타고있던 UN차량을 공격했다. 이 테러를 주도한 인물은 세명으로 Yitzhak Yezernitsky (후에 이스라엘의 수상 Yitzhak Shamir) Nathan Friedmann (also called Natan Yellin-Mor), Yisrael Eldad (also known as Scheib)였다.
이때 참모였던 랄프 번치는 무사했는데, 테러리스트들은 폴케 베르나도테 옆에 앉아있었던 참관인 Serot대령을 랄프 번치로 오인했기때문이었다. Serot 대령은 즉사했지만 폴케 베르나도테는 병원으로 호송되었지만 역시 사망했다.
스웨덴 정부는 폴케 베르나도테의 죽음이 이스라엘 정부의 지시로 이루어졌다고 굳게 믿었다. 그의 유해는 스웨덴으로 옮겨졌으며, 살아남았던 랄프 번치가 그의 후임이 되었다. 그리고 1949년 평화협정이 이루어져 전쟁이 끝났다.
폴케 베르나도테의 암살을 주도했었던 Nathan Yellin-Mor (가운데)
스웨덴의 웁살라에 있는 폴케 베르나도테 기념비
195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공을 세운 랄프 번치가 수상했다.
랄프 번치
195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어쩌면 폴케 베르나도테가 White Buses에서 유대인들을 구하는데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것은 그가 유대인테러리스트들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면, 이차대전때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해줬던 사람이 결국 유대인에게 죽은것이니 말입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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