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뭐 루이즈 왕비 이야기를 열심히 파다보면 스웨덴 왕실 이야기를 좀 알게 됩니다.
스웨덴은 엄격한 귀천상혼제를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베르나도트 장군이 평민출신이면서 왜 그러냐"라고 물으신다면, 저렇게 해야 안그래도 "벼락부자"라고 무시하는 유럽 왕가들에 대해서 그나마 버틸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드리고 싶습니다. 얼마나 엄격했냐하면 루이즈 왕비가 구스타프6세 아돌프와 결혼할때 그녀의 신분이 애매했습니다. 루이즈는 그때 영국 후작의 딸인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으로 살아가고 있었기때문에 왕족신분에 포함되는지 아닌지 애매했거든요.(아버지가 Prince칭호를 포기했기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조지5세가 루이즈를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협정서를 구스타프5세와 체결하게 만듭니다.
칼14세 요한의 외아들인 오스카르1세는 스웨덴에서 국왕이 될것이 분명했음에도 딸을 줄려는 왕가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외젠 드 보아르네의 딸과 결혼하죠. 요세피나 왕비 역시 "벼락부자"가문 출신이긴했지만, 외가가 막강한 바이에른 왕가 아니겠습니까.. 비텔스바흐 가문은 이전에 이미 스웨덴 왕가를 배출햇던 가문이었으며, 요세피나 왕비의 이모들은 아시다시피 오스트리아황후,프로이센왕비,작센의 왕비들, 오스트리아 황제 어머니, 오스트리아 황후 어머니 등등이 되죠.
하지만 오스카르1세의 아들인 칼 15세가 결혼할때도 스웨덴왕가와 통혼하는것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습니다. 요세피나 왕비의 이모였던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왕비의 영향력으로 칼15세와 빌헬름1세의 딸인 루이제 공주의 약혼이 성사되었습니다. 하지만 칼15세가 일방적으로 약혼을 깨버렸는데, 이후 결혼하는 여성은 국왕의 딸도 아닌 국왕의 손녀였던 네덜란드의 루이제였습니다. 사실 루이제와의 약혼도 혼수문제로 깨질뻔했는데, 네덜란드와의 약혼도 깨지면 아마 더이상 공주를 주려는 왕가가 없을것이라는 이유로 그냥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불행했다고 합니다.)
뭐 후손도 그다지 많지 않았기때문에 대부분 귀천상혼을 하지 않았는데, 오스카르2세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스카르2세는 모두 네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둘째아들인 오스카르가 왕족이 아닌 스웨덴 귀족여성에 반해버린것이죠. 형수였던 바덴의 빅토리아의 시녀였던 에바 문크에게 반해서 그녀와 결혼하려합니다. 이에 왕실은 경악했는데, 처음에는 왕실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에게 유예시간을 주죠. 잘 생각해보라는 의미로 2년동안이나 기다리게 합니다. 이동안 왕실에서는 다른 아들들에게 귀천상혼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았습니다. 결국 오스카르 왕자는 결혼했고,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합니다. 하지만 오스카르 왕자를 평민으로 둘수는 없었죠. 그래서 오스카르 왕자의 외삼촌인 룩셈부르크의 아돌프는 조카에게 비스보리의 백작 칭호를 줍니다. 이후, 스웨덴 왕가에서 귀천상혼으로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한 왕자들은 이 칭호를 씁니다. (룩셈부르크에서 계속 칭호를 허락해주는군요) 이 칭호는 더이상 쓰지 않게 될것인데 왜냐면 현 스웨덴 국왕 역시 옛기준을 따르면 귀천상혼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할아버지인 구스타프6세 아돌프가 살아있을때 결혼했다면 귀천상혼으로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을수도 있다..라는 이야기를 읽은적이 있다죠.)
첫번째 비스보리 백작 오스카르
오스카르는 오스카르2세의 아들로, 에바 문크와의 결혼으로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합니다. 그는 결혼과 함께 왕실에서쫓겨났으며, 오스카르2세에게는 이후 세아들만이 있죠. 하지만 왕실에서는 둘의 결혼을 인정했으며,가족간의 교류도 활발했습니다. 오스카르의 막내아들이었던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은 정치가로 유명햇으며 팔레스타인 문제를 중재하기 위해 유엔 대표로 갔다가 그곳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오스카르 왕자
두번째 비스보리 백작 렌나르트
렌나르트는 구스타프5세의 손자로 구스타프5세의 둘째아들인 빌헬름 왕자와 그의 이혼한 부인인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32년 영국 여성과 결혼하면서 그는 왕위계승권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1951년 룩셈부르크의 샤를로트 여대공이 그에게 비스보리 백작 칭호를 쓰도록 허락하죠.
렌나르트 왕자
세번째 비스보리 백작 시그바르드
시그바르드는 구스타프6세 아돌프와 그의 첫번째 부인인 코넛의 마거릿의 둘째아들로 현 스웨덴 국왕의 숙부입니다. 1934년 평민과 결혼하면서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습니다. 그 역시 1951년 샤를로트 여대공에 의해 비스보리 백작 칭호를 쓰는것을 허락받습니다. 그는 생활용품을 디자인했습니다.
이후 1983년 그는 prince of sweden칭호를 다시 요구합니다만 국왕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시그바르드 왕자
네번째 비스보리 백작 칼 요한
칼 요한은 구스타프6세 아돌프와 그의 첫번째 부인인 코넛의 마거릿의 막내아들로 그 역시 현 스웨덴 국왕의 숙비입니다. 1946년 평민과 결혼해서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고, 역시 1951년 비스보리 백작 칭호를 쓰는것을 허락받았습니다. ...빅토리아 공주 결혼식때 팍삭 늙으신 할아버지 한분 나오시는데 그분이 바로 칼 요한입니다.
빅토리아 공주 결혼식때의 칼 요한
맨앞의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입니다.
이렇게 네명의 비스보리 백작이 있습니다만, 이외에도 스웨덴 왕실에서 귀천상혼한 사람이 두명더 있습니다.
한명은 오스카르2세의 아들인 칼 왕자의 손자인 칼왕자입니다. 그의 누이중 한명이 유명한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왕비죠. 칼 왕자 역시 귀천상혼후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지만, 매형인 벨기에의 레오폴3세는 처남에게 베르나도트공이라는 칭호를 쓸수 있게 허락합니다.
칼왕자
또한명의 귀천상혼한 사람은 바로 현국왕의 숙부중 한명이었던 벨틸왕자입니다. 벨틸 왕자역시 사랑했던 사람이 평민에 이혼한 여성이었죠. 하지만 큰형이 죽고, 형들과 동생들이 몽땅 귀천상혼하는 바람에 왕위계승자가 남아있지 않았던 스웨덴 왕실에서 그마저 귀천상혼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만약 구스타프6세 아돌프가 손자인 현 스웨덴 국왕이 성인이 되기전 사망할경우 섭정이 필요했는데, 만약 그마저 귀천상혼한다면 섭정이 될수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 스웨덴 국왕이 왕위를 계승한후 결혼한후에 오랫동안 연인이었던 릴리안 데이비스와 정식결혼했고 둘의 결혼은 왕실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릴리안 왕자비는 왕실 행사에 자주 참석했던 인물이지만 최근 빅토리아 공주의 결혼식에는 불참했는데, 알츠하이머 병때문이라고 합니다.
2차대전때 할아버지 구스타프5세와 아버지 구스타프6세 아돌프와 함께 있는 벨틸 왕자
스웨덴 왕실 이야기를 좀 읽다가 보면 현 스웨덴 국왕의 어머니인 시빌라 왕자비가 아들 못낳아서 스트레스 받았다는 이야기가 이해가 된다죠. 왜냐면 현 스웨덴국왕이 태어나던 시점에서 왕위계승권을 박탈 안당했던 왕자들은 당시 왕태자이자 현 스웨덴 국왕의 할아버지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현 국왕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빌헬름왕자(구스타프5세의 둘째아들-하지만 아들은 귀천상혼).현 스웨덴 국왕의 숙부인 벨틸왕자가 다였으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시빌라 왕자비는 그전에 딸만 넷을 낳았다죠.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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