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그림과 사진으로보는 스웨덴의 칼14세 요한 (1)

엘아라 2010. 7. 23. 23:3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무생각없었는데, 문득 보니 올해가 프랑스의 베르나도트 장군이 스웨덴으로 이민간지 200주년되는 해입니다. 스웨덴에서 뭐 안하나하고 뒤져봤더니, 여러가지 의미있는 전시회를 하네요. (물론 왕실주최의 행사들도 있구요. 하지만 정작 빅토리아 공주 결혼식때문에 묻히는 경향이..ㅎㅎㅎ)

 

 지금은 바빠서 못하고, 좀 한가해지면 베르나도트 전기를 열심히 읽어서 올해안에 "베르나도트: 프랑스에서의 삶"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

 

 

 

포에 있는 베르나도트 박물관

프랑스의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칼14세 요한의 생가입니다.

아버지는 법조계에서 일했다고 전해지며, 어머니는 귀족가문과 연관되는 가문 출신이라고 합니다.

형과 누나가 있었으며 막내였는데, 형 역시 이름이 장이었다고 하네요.

칼14세 요한은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이고, 형은 사도요한이 성인이었다고 합니다.

한때 베르나도트는 포 출신으로 프랑스 국왕이 된 나바르의 앙리(앙리4세)와 비교되고는 했습니다.^^*

(참고로 8월이던가 9월이던가 이곳에서도 전시회가 있습니다.)

 

1792년의 베르나도트

제36 보병연대 중위

베르나도트는 어린시절부터 가업인 법조계의 일을 물려받는데 흥미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죽은후 십대에 자원해서 Royal la Marin의 병사로 입대합니다.

그리고 장교가 되기까지 11년이 걸립니다.

당시 프랑스의 구체제하에서는 귀족이 아니라면 장교가 될수 없었는데, 제3신분출신인 베르나도트는 장교가 될수 없었는데, 프랑스 혁명은 이런 그에게 장교가 될 기회를 줬으며, 나중에는 장군으로 이름을 드날리게 해줍니다. 이때문에 베르나도트는 "공화국"에 충성한다는 이야기를 자주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을 만나면서 달라지죠..ㅎㅎㅎ)

 

장군시절의 베르나도트

1794년 플뢰뤼스 전투의 공으로 베르나도트는 장군이 됩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여단장(중장)의 지위에 오릅니다. 그는 용감한 군인이으로, 하사관 시절 스스로 군율에 복종했으며, 장군이 된후에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군율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는 만큼,병사들의 복지에 최선을 다했기에 베르나도트의 병사들은 장군을 존경했고, 다른 병사들에게도 인기있는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뭐 잘대해주는데 좋아하지 않을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하지만 그는 군율을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휘하에 갔을때는 기존의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에게 "미쳤다"내지 "독재자"라는 평을 듣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용감한 장군..이라는 이야기는 합니다.)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 

1797년

베르나도트의 삶에서 중요햇던 인물을 들라면 아마도 클레베르와 베르나도트가 아닐까합니다.

둘다 베르나도트의 상관이었는데, 둘은 상반된 의미로 베르나도트에게 남았을듯합니다.

클레베르는 베르나도트의 능력을 높이 샀으며, 친구가 되었고 그를 위해 힘을 써줬습니다. 그리고 평생 우정을 유지했죠. 베르나도트 역시 클레베르의 충고를 열심히 따르기도 하는등 그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반면 나폴레옹과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벌어지는 관계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에 대해 "질투심"이 작용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자신보다 어리지만 능력도 뛰어나고, 재능도 있고, 세상에 대한 지식도 훨씬 많으며, 교육까지 잘 받은 나폴레옹에게 "하사관"출신으로 군에서만 머물렀던 베르나도트는 뭐랄까 열등감 비슷한것을 느꼈을듯합니다.

이때문에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을 배우려고 합니다. (나폴레옹을 만나고 나서는 특유의 소심함이 좀 줄어드는듯했어요. 전 베르나도트가 자신이 모르는 분야나 자신의 명예가 걸린 일에서는 매우 소심하게 행동한다고 생각되거든요. 나폴레옹의 대범함을 좀 배운듯.... -베르나도트는 군인으로는 매우 용감하고 결단력있었지만, 정치적 문제등에는 진짜 소극적이었습니다. )

 

 

클레베르 장군

나폴레옹은 클레베르에 대해서 "군복을 입은 마르스"라는 표현을 했으며, 그가 전장에 있는것보다 더 좋은 징조는 없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합니다.

클레베르 장군은 베르나도트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를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해줬습니다.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하지만 클레베르는 대범하고 정치적 안목이 더 높습니다.) 베르나도트를 아꼈던것이 아닐까합니다.  사소한 문제로 퇴직하겠다는 베르나도트를 말린것도 클레베르였으며, 나폴레옹 휘하에서 복무하도록 추천한것도 클레베르였습니다.

 

장군복장의 베르나도트

베르나도트는 빈에서 대사직을 수행했는데, 외교적 마찰을 일으킨후 프랑스로 돌아옵니다.

이 외교적 마찰 역시  명예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베르나도트의 성격이 드러난 사건으로 솔직히 그냥 군인했어야지 외교관은 좀 아니었다고 봅니다.

 

 

베르나도트

베르나도트는 위의 그림에서 묘사되는것처럼 큰코에 강렬한 눈빛의 매를 닮은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키가 컸으며 이마에는 흉터가 있었기에 그의 인상을 더 강렬하게 했습니다.

동시대 기록에서는 베르나도트가 병사들의 행렬에 선두에 있는 모습은 너무나 멋있었다라고 기록합니다.

(ㅎㅎㅎ 하지만 멋진 모습은 뮈라가 최고였는지, 선봉에선 뮈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더라구요.)

 

 

데지레 클라리

마담 베르나도트

스웨덴의 데시데리아 왕비

결혼전 이탈리아에서

 

데지레 클라리는 소설 "데지레"에서 나오는대로 나폴레옹이 결혼을 약속한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녀가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사교계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줄 모르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라는 사실에 파혼합니다. 이후 데지레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폴레옹과 보나파르트가의 관계때문에 "야심많은"남자들이 눈여겨 보는 여성이 됩니다.

 

 

데지레

결혼후

 

나폴레옹과 데지레의 관계는 베르나도트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자신이 약혼을 깬것에 미안한 감정과 가족에게 약했던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와 마찰을 일으켰을때, 데지레 때문에 차마 베르나도트를 처형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데지레는 남편의 경력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그저 남편과 행복하게 살길 바랬다고 합니다. (데지레에게는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 눈밖에 나서 집에서 놀았을때가 제일 행복했었을때였을듯하다죠.)

 

 

 

프랑스 육군 원수 시절의 베르나도트

 

 ㅎㅎㅎ 아직 저시대까지 읽지를 않아서 사실 나폴레옹과의 상황을 잘 모른답니다. (전 나폴레옹이 관심인물이 아니거든요. 나폴레옹 전쟁이야기도 안읽어봤고 말입니다. 뭐 나폴레옹이 매력적인 인물이긴하지만, 전 소심하고 때론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베르나도트가 더 마음에 든답니다. 나폴레옹은 너무 "영웅"적인 모습이거든요. 반면 베르나도트는 "인간"같구요.)

 

 

프랑스에 있는 베르나도트의 집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눈밖에 난후 한동안 이곳에서 놀았습니다.개인적으로는 데지레가 제일 좋았을듯해요. 남편이 전쟁터에도 안나가고, 복잡한 정치에도 개입안되고, 자신과 아이랑 함께 있어줬으니 말입니다.

 

 

폰테코르보의 문장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게서 폰테코르보 공(Prince of Ponte Corvo) 칭호를 받습니다.

그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가 되면서 이 직위와 영지를 반납했으며, 이 칭호는 후에 뮈라의 후손들이 씁니다.

 

 1810년의 데지레

 

 역시 1810년의 데지레

스웨덴 궁정예복을 입은 모습

 

데지레는 스웨덴에서 적응한는것에 실패했습니다. 양시어머니가 되는 스웨덴의 샤를로타 왕비가 데지레를 못마땅해했습니다. (반면 쫓겨난 구스타프4세 아돌프의 어머니 소피아 마그달레나 왕비는 데지레한테 잘해줬다고 합니다.) 샤를로타 왕비는 데지레에 대해서 혹평을 했는데 "자신의 나라를 흘끗이라도 돌아보지 않으려한다."라던가 "아들을 치맛폭에 감싸고 망치고 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샤를로타 왕비의 혹평은 그녀의 출신이 평민이라는 사실에 기인한것이라고 이야기하는것이 대부분이긴하지만, 정치에 관심없던 데지레의 행동이 못마땅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스웨덴의 정치 역시 복잡햇는데, 샤를로타 왕비는 베르나도트를 왕위계승자로 선출하는데 반대하다가, 그를 만난후 지지하는 입장으로 바꾼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왕비가 보기에는 데지레가 너무 모자랐을수도 있습니다.)

 

 

1811년경의 칼14세 요한

 

전 이민가기전에는 베르나도트라고 해야되지만, 이민 간후에는 스웨덴의 칼14세 요한이라고 써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솔직히 외국공주들이 다른나라로 시집가면 그나라 사람으로 취급받는거랑 똑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대공이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되는것처럼 말입니다. ^^*

저기 왕태자시절의 그림이라는것을 알수 있는것이 달고 있는 훈장이 가슴앞에 달고있는 노란색 리본의 배지는 검훈장의 배지인듯 하거든요. 그뒤의 빨간색 리본은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배지입니다.

 

 

스웨덴의 왕태자 칼 요한

....나이가 들수록 이마가 넒어지시더군요.

젊은시절의 날카롭던 눈매와 코는 나이들면서 안정감을 찾으면서..뭐랄까 옆집 아저씨 인상으로 바뀝니다.

전 나이들어서 그림만 많이 봤을때, 전기의 "잘생긴 외모"라는 표현이 이해가 안됐는데, 젊은 시절 초상화를 보니 좀 수긍이 되더라구요.^^*

 

 

칼14세 요한의 문장

바탕의 문양은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을 상징하며, 안쪽에는 베르나도트의 개인문장입니다

바깥쪽의 삼중관과 푸른바탕의 노란사자는 모두 스웨덴을 가리킵니다.

반면 빨간색바탕의 도끼들고 있는 사자는 노르웨이를 가리키구요.

(맨날 국기가 헷갈리는데,스웨덴은 푸른색, 덴마크는 빨간색, 노르웨이는 빨간색 바탕에 파란색 이렇게 외우면되겠군요...-0-;;)

가운데 방패의 왼쪽은 바사가문의 문장입니다. (스웨덴왕가에서 바사가를 빼놓으면 안되죠. 스웨덴이 강성했던 시기가 이 바사가문때부터였으니 말입니다.)오른쪽은 폰테 코르보의 문장입니다.

 

 

 

칼14세 요한의 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