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ㅎㅎㅎ 파리의 개선문은 매우 유명하죠. 나폴레옹의 명으로 건축된 이 건축물은 우리나라의 독립문에도 영향을 준 건축물입니다.
이 건축물은 나폴레옹의 명으로 처음에는 지어지기 시작했지만, 후에 국왕 루이 필리프가 완성했다고 합니다. 뭐 유명한 건물이니 가이드북에 잘 나오겠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개선문에 조각된 부조 이야기입니다. 부조가 10개가 있다는데 제가 아는이야기가 몇개있어서 말입니다.....ㅎㅎㅎ
그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파리의 개선문
개선문에는 네개의 주된 부조와 여섯개의 묘사부조가 있습니다.
문의 양쪽면에 네개의 부조가 있고 윗쪽 면에 여섯개의 시리즈 부조가 있죠. 그럼 한번 볼까요.
1792년 라 마르세예즈 (의용군의 도착)
1792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프로이센군이 주축이 된 동맹군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하자 전국의 의용군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마르세유쪽 의용군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갔대나 어쩐대나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하여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용군들이 모여든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한거 아닌가요..프랑스가 안하면 다른나라가 할판이었던가..)
1810년
나폴레옹 보이시죠. 승리의 여신이 월계관을 주는거 보니 무슨 대승했나본데 뭐를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프랑스 혁명전쟁이야기나 하다못해 베르나도트 장군 전기도 1797년밖에 안가서 솔직히 저때 무슨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1810년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위계승자가 되긴했습니다.--;;)
1814년La Résistance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해서 엘바섬으로 귀양갑니다.
1815년 평화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난뒤 어쨌든 평화가 온것을 의미한댑니다.
이 주된 부조 외에 개선문 상단에 여섯개의 시리즈 부조가 있습니다. 그중 다는 모르고 제마프 전투와 마르소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볼까합니다. (다른것은 아직 덜읽었어요. 제마프 전투는 1792년에 일어나서 읽었고, 마르소 장군의 죽음은 베르나도트 전기에 있다죠.)
먼저 쓸 내용은 마르소 장군의 죽음입니다.
마르소 장군의 죽음 (1796년)
마르소 장군은 프랑스 혁명기의 장군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서 10대에 자원입대했으며, 혁명을 거치면서 장군이 되었죠. 그가 죽을때 나이는 겨우 27살이었지만, 계급은 중장(사단장)이었습니다. 뛰어난 군인이었던 그는 방데 내전에 투입되었는데, 방데 내전에서 클레베르와 함께 이름을 떨칩니다. 동시대 사람 중 한명은 클레베르와 마르소의 우정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나라를 구할것이다라고 합니다. 마르소는 뛰어난 군인이며 충성스러운 공화국의 장군이었지만, 또 낭만적인 사람으로 젊은 시절 두명의 여성과 연관됩니다. 한 여성은 방데 내전에서 만났던 왕당파 여성으로 기사도적 정신을 발휘해서 그녀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 그여성은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또 그는 또 다른 왕당파 여성과 사랑에 빠져서 약혼을 했지만, 결국 헤어졌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영광을 가져다준 플뢰뤼스 전투(1794년)에서 그는 클레베르와 함께 주르당 휘하에서 싸웠고, 영광스러운 승리의 전투에 주역으로 이름을 알리죠.
1796년 그는 주르당의 세번째 독일 침공시에 목숨을 잃습니다. 이때 주르당의 작전에 장군들이 불만을 품었고, 친했던 클레베르등이 전투에 불참하는등의 일을 했지만 마르소는 명예를 위해서 총사령관의 명을 수행했습니다. 결국 주르당은 독일에서 퇴각해야했는데, 마르소는 베르나도트와 함께 이 퇴각하는 군대의 후미를 담당했습니다. 퇴각하던중 마르소는 숨어있던 저격병의 총을 맞습니다. 이때 베르나도트가 곁에 있었는데, 마르소는 베르나도트의 손을 잡고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둘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있다고 합니다.
" 가시오, 동지여, 가서 다른이들의 잘못을 바로 잡으시오.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하지만 내가 죽을때까지, 날 보지 마시오. 내 부대는 무질서하게 달아나기 시작했소. 이 생각만이 나를 죽일것이오."
"아니오 친구여" 베르나도트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걱정 마시오. 그대가 지켜보고 있는한, 그대의 부대는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에게 맞설것이오. 안심하시오. 이 퇴각은 훌륭하게 수행될것이오."
퇴각임무를 수행해야했던 베르나도트는 결국 마르소의 뜻대로 그를 전장에 남겨두고 후퇴합니다. 이런 마르소의 행동에 오스트리아군은 존경을 표했고, 그를 돌봐줍니다만 총에 맞은 이틀후 사망합니다. 그가 죽자 오스트리아의 총사령관이었던 카를 대공은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호위아래 마르소의 시신을 프랑스군의 사령부가 코블렌츠로 보내줍니다. (카를 대공도 기병대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의 죽음과 장례식은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기사도 정신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마르소는 화장되어서 코블렌츠에 묻혔는데 클레베르는 마르소의 묘를 디자인했고, 베르나도트는 후에 마르소의 누이에게 그의 화장한 재 일부를 보내줬다고 합니다. 이후 마르소의 재는 파리의 판테온에 안장됩니다.
기병대 복장의 마르소 장군
마르소는 장군 복장이 아니라 저렇게 기병대 복장을 하고 있었댑니다.
물론 장군을 상징하는 복대는 둘렀구요. ^^*
제마프(Jemmape)전투 (1792)
이 전투는 발미전투로 유명해진 뒤무리에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를 침공하는 내용입니다. 프랑스 공화국의 첫 승리는 발미전투였습니다만, 사실 발미전투는 전투다운전투가 아니었습니다. 발미전투 내용을 보면 프랑스군이 기압을 넣고 돌격하니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이 그냥 후퇴했다...이렇게 나옵니다.-0-;;;
하여튼 제마프 전투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던 테센공작이 프랑스군을 방어하려했던것으로 뒤무리에의 지휘아래있었죠.
제대로 훈련받지 않았던 의용군들이 오스트리아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이 전투는 프랑스가 '전투"로도 적을 무찌를수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 전투였다고 합니다. 이전투의 패배로 오스트리아군은 로르강 뒤로 물러났으며, 결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뺏기게 됩니다.
비 정규군이었던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보다 세배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만 전투의 승패는 사상자의 수가 아니라 전투후 결과로 이야기한다더라구요. 그래서 프랑스가 승리한 전투랩니다.
뒤무리에
1792년에는 승리의 장군이지만, 1793년에는 오스트리아 군에게로 도망갑니다.
나머지 부조들은 아직 덜 읽어서 잘 모릅니다..ㅎㅎㅎ
1796년 아르콜라 전투
잘 모르는데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탈리아군(이탈리아내에 주둔중이던 프랑스군을 이렇게 불렀습니다.)이 거둔 대승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폴레옹이 깃발들고 있는 그림이 저 부조에 있는 그림이랑 비슷한듯하네요.
아르콜라 전투의 나폴레옹
1798년 피라미드 전투
....잘모르는데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중 중요한 전투인듯하더라구요.
아하하..아직 1797년(그것도 베르나도트 있는 전선은 그렇고 없는 전선은 1793년..)밖에 모릅니다.
1799년 아부키르 전투
역시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시 전투로 이 전투이후 프랑스가 이집트를 장악했다고 합니다.
(...1799년에 영국 해군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나요..ㅎㅎㅎ)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
유명한 전투인데 안읽어봐서 잘 모르겠습니다..ㅎㅎㅎ
어쨌든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무찌른 전쟁되겠습니다.
(육군은 잘 나갔는데 반면 해군은 맨날 영국한테 깨지는...-0-;;;)
그림&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자료출처
1.Bernadotte: first phase 1763-1799 (1915)
2. (제 포스트 "프랑스 혁명전쟁"시리즈에 나오는 참고 문헌과 동일...ㅎㅎㅎ 칠려니 귀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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