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조카를 위한 역사이야기...2.스웨덴의 로비사 공주(덴마크의 루이세 왕비)

엘아라 2009. 1. 28. 03:35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글쓰기 싫은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감수성 최악의 시기인게죠..--

이럴때는 비축해놓은 글을 올리면 된다는 생각을...--;;;

예전에 지인의 아이에게 써주던 공주님 이야기를 시리즈로 계속 쓰고 있답니다. 일단 스웨덴 공주님 시리즈로 나갔었다죠...--;;; 어쨌든 첫번째는 유셰니공주였고 두번째는 바로 로비사 공주입니다.

역시 초등학생용이라 안좋은 내용은 다뺐다죠..-0-;;;;;

 

늘 느끼는거지만 아이들에게 세상은 아름답다..라고 말하기가 참 힘드네요......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것이겠죠.^^*

 

 

 

스웨덴의 로비사 공주

후에 덴마크의 프레더릭8세의 왕비

덴마크의 루이세 왕비

Princess Lovisa (Louise) Josefina Eugenia of Sweden and Norway

after Queen Louise of Denmark

 



 

 

로비사 공주

생몰년도 : 1851-1926(74살)
타이틀 : Svensk och Norsk Prinsessa  (Swedish and Norwegian Princess)
             Dansk-Isländsk drottning (Danish-Icelandic Queen)

 

로비사(루이세) 요세피나 유셰니아는 1851년 10월 31일 스톨홀름 왕궁에서 25살의 왕태자 칼과 그의 아내인 23살의 네덜란드의 루이제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Sessan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로비사라는 이름은 어머니 로비사 왕비의 이름에서따온것입니다. (로비사는 영어식으로 루이즈라는 이름의 스웨덴식 이름이죠. 같은 이름이라도 조금씩 다른데 영어권에서 루이즈인 이름도 덴마크에서는 루이세로 불렸고, 독일에서는 루이제로 불리죠. ^^* 개인적으로는 로비사라는 이름을 참 좋아합니다. 음이 참 예쁘지 않나요.) 요세피나는 할머니인 요세피나 왕비의 이름에서, 유셰니아는 고모인 유셰니공주의 이름에서 따온것입니다. 가족들에게서 로비사는 Sessan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로비사의 남동생이자 왕위계승자인 구스타프가 태어나지만 어린나이로 사망하죠. 때문에 로비사는 부모의 외동딸이 되었고, 칼 15세와 로비사 왕비는 딸을 끔짝히도 사랑했다고 합니다.

 

 

 

스웨덴의 칼 15세

 

 

 

 

네덜란드의 루이제

스웨덴의 로비사 왕비

 

로비사는 당시 얌전한 교육을 받던 소녀들과 달리 매우 활달한 소녀였다고 합니다. 칼 15세는 그런 딸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어머니인 로비사 왕비는 딸이 얌전한 처녀가 되지 않을까봐 걱정했다고 합니다. 칼 15세는 자신의 딸에 대해 "그애는 못생긴 악동이지만, 무척이나 재미있는 아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칼15세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어머니였던 로비사 왕비는 딸이 '사내아이'처럼 자란다고 생각했고 못마땅해하면서 엄격한 교육을 시키려했다고 합니다.

칼 15세는 외동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비사가 스웨덴의 여왕이 되려면 두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먼저 법률을 개정해야했죠. 당시 유럽에서 여성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는 나라는 몇나라 되지 않았습니다. 영국만이 확고하게 여성의 왕위계승을 인정했죠.  다른 나라들도 여왕을 인정하는 나라들이 있었습니다만 시대를 거치면서 여성이 왕위를 잇는것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스웨덴 역시 여성이 왕이 되는것을 인정하지 않았죠. 하지만 스웨덴은 역사적으로 여왕을 인정했었습니다. 크리스티나 여왕과 울리카 엘레노라 여왕이 있었고 덴마크의 마르가레테 1세의 통치를 받은적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법률을 바꾸는것은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번째문제가 더 큰 문제였죠. 바로 연합왕국을 형성하고 있던 노르웨이였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여성왕위계승자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노르웨이는 로비사의 증조할아버지인 칼 14세 요한때 스웨덴에 강제로 편입된 나라였습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웨덴과 연합왕국을 구성해야만했습니다. 노르웨이는 스웨덴과는 별개의 의회를 구성했습니다만 스웨덴 국왕을 자신들의 국왕으로 받아들여야했죠. 만약 로비사가 왕위에 오른다면 노르웨이는 더 이상 스웨덴 군주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스웨덴에서 독립하려 할것이었기때문입니다.  

로비사의 왕위계승문제는 숙부인 오스카르 왕자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해결됩니다. 왕위는 오스카르 왕자와 그 후손들에게 이어지게 되죠.

 

 

 

오스카르2세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들

왼쪽이 아들인 구스타프5세 오른쪽이 손자인 구스타프6세 아돌프

안고 있는 아이는 현 스웨덴 국왕님의 아버지인 구스타프아돌프 왕자

.....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는  구스타프5세가 살아있을때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로비사는 교육을 잘 받았는데 특히 언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문학 작품을 읽는데 심취했다고 합니다.  스웨덴의 공주라는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가진 로비사는 매우 훌륭한 신부감으로 여겨졌고 유럽의 여러 왕족들이 로비사의 남편감으로 고려됩니다. 로비사의 부모는 그들중 덴마크의 프레더릭 왕태자를 남편감으로 고릅니다.

덴마크의 프레더릭 왕태자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앙9세와 헤센-카셀의 루이세의 큰아들이었습니다. 당시 프레더릭의 동생들은 각각 영국의 왕태자비, 그리스의 국왕,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되어있었죠.

 

덴마크의 크리스티앙9세의 자녀들

왼쪽에서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1세,러시아의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영국의 알렉산드라 왕비, 덴마크의 프레더릭8세(로비사의 남편), 하노버의 공작부인 티라, 발데마르 왕자

 

 

1868년 7월 15일 16살의 로비사는 25살의 프레더릭 왕태자와 만납니다.당시 북유럽지방에는 범 스칸디나비아 주의(스칸디나비아지방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였지만, 1차대전동안 실패로 돌아갑니다.)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의 결혼은 양국 국민들에게 매우 환영받는 일이될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레더릭 왕태자의 어머니인 덴마크의 루이세 왕비는 이 결혼에 처음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어릴땐 무척이나 활달한 소녀였지만 엄격한 어머니의 교육때문에 얌전하고 신앙심 깊은 처녀로 성장한 로비사가 유쾌하며 가족적인 덴마크 왕실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고 합니다. 또 왕위계승자의 부인으로써 공적 생활을 많이 해야했는데 로비사가 자신의 어머니인 로비사 왕비처럼 개인 생활을 더 소중히 하기만 할까봐도 걱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로비사는 덴마크어를 따로 배울필요가 없었기에 덴마크 왕실에 더 빨리 적응할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죠.

로비사와 프레더릭은 1869년 7월 28일 스톡홀름에서 결혼했습니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루어졌고, 고모와 어머니처럼 로비사도 자선사업에 관심이 있어서 결혼하던 해에 가난한 어린이를 돕기위한 Prinsessan Louises minnesfond(루이세 공주의 기금쯤 되겠죠)을 조성했습니다.

 

로비사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첫번째로 못생긴 공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입과 광대뼈는 튀어나왔고 목을 휘었기에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 남편의 조카들인 그리스 왕가의 아이들은 그녀를 '앤트 스완'이라고 불렀는데 외모가 고니처럼 입이 튀어나오고 목이 휘어서였다고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엄격한 성품이었다고합니다.

 

나이든 후의 로비사  

 

로비사가 결혼해서 덴마크에 왔을때 덴마크 국민들은 로비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합니다. 공주들이 외국으로 시집갔을때 겪는 가장 큰 불편인 언어문제가 거의 없었죠. 그리고 어린시절의 쾌활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줘서 덴마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로비사의 부모인 칼 15세와 로비사 왕비 모두가 사망합니다. 형제자매가 없던 로비사에게 부모의 죽음은 자신이 세상의 외톨이가 된듯한 느낌을 받게 했습니다. 이때문에 로비사는 신앙심이 더욱더 깊어졌고 아이들과의 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모습은 왕실가족들에게는 공적 임무를 소홀히 하는것으로 비춰지기도 했습니다.

 

로비사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아이들을 잘 양육하고 교육하는데 열정을 다 했다고 합니다. 로비사는 매우 엄격한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다 키운후 로비사는 자선사업에 열정을 쏟았다고 합니다. 로비사 역시 자신의 유산을 자선사업에 썼다고 합니다.

 로비사는 가장 오래도록 덴마크 왕태자비로 머물러 있었는데 무려 36년간 왕태자비로 있었다고 합니다. 1906년 남편 프레더릭이 덴마크의 프레더릭8세로 즉위했으며 로비사는 덴마크의 루이세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남편이 즉위한 6년후 남편이 사망하고 아들 크리스티앙이 크리스티앙10세로 즉위합니다. 로비사의 둘째 아들 칼은 로비사의 아버지인 스웨덴의 칼 15세의 이름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후에 스웨덴에서 독립한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선출되어 호콘7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합니다.

 

로비사의 아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크리스티앙  1870-1947 (덴마크의 크리스티앙10세)
2. 칼  1872-1957  (노르웨이의 호콘7세)

3. 루이세 1875-1906 (샤움부르크-리페의 프리드리히 공과 결혼)
4. 하랄드 1876-1949
5. 잉에보리 1878-1958 (오스카르2세의 아들 칼왕자와 결혼,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왕비, 노르웨이의 마르타 왕태자비, 덴마크의 마르가리타 왕자비의 어머니)
6. 티라 1880-1945 (미혼
7. 구스타프  1880-1944 (미혼)
8. 다그마르(다우마) 1890-1961 (평민과 결혼, 로비사는 딸이 평민과 결혼하는것을 반대했다고합니다.) 

 

 

 

자료출처

1. 스웨덴 역사 사이트

http://www.historiesajten.se/

2.위키피디어 (스웨덴어, 독일어 포함)

그림출처

1. 위키피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