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스웨덴의 왕비들...2.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왕비들

엘아라 2008. 10. 27. 21:55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전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를 제일 좋아하기때문에 얼떨결에 스웨덴 역사에 대해서도 쬐금씩 알게되었답니다. 스웨덴 왕비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구요.

뭐 예전에 현 스웨덴 왕가의 왕비들에 대해서 그림을 올렸었죠.(때문에 맘상하기도 했구요..아하하..-0-;;)

이번에는 홀슈타인-고토로프 왕가의 왕비들에 대해서 올려볼까합니다.

 

홀슈타인-고토로프가문은 올덴부르크가문의 한 분가로 북유럽의 중요한 가문이었습니다. 이 가문은 덴마크의 왕가에서 분가한 가문으로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왕가와 밀접하게 관계되어있고,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후계자였던 페테르는 러시아의 표트르대제의 외손자이자 옐리자베타여제의 조카기도 했습니다. 이에 그는 러시아의 황위 계승자가 되어 후에 표트르3세가 되죠. (하지만 부인인 예카테니라2세에게 권력을 뺏기고 죽임을 당하죠.) 어쨌든 표트르3세의 후손들이 러시아 황위를 이었고 그결과 러시아의 황제들은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지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표트르3세의 오촌이 되는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아돌프 프레데리크는 오촌조카가 러시아 황위계승자가 되면서 스웨덴 왕위계승자가 되는 유리한 입지에 섭니다. 그의 백부가 스웨덴공주와 결혼했는데 실제적으로 계승권을 물려받을수 있는 표트르3세(아돌프 프레데리크의 사촌의 아들)는 러시아의 황위계승자가 되었기에 그가 스웨덴의 왕으로 선출될수 있었습니다.

 

아돌프 프레데리크는 왕위계승자가 된후 프로이센의 공주였던 루이제 울리케와 결혼합니다.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

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

아돌프 프레데리크의 왕비

Louisa Ulrika of Prussia (Swedish: Lovisa Ulrika; German: Luise Ulrike)

(Berlin, 24 July 1720 - Swartsjö, 16 July 1782)

 

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헤름1세와 그의 왕비였던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딸입니다. 조피 도로테아는 영국의 조지1세의 딸이었죠. 루이제 울리케의 오빠가 바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였습니다. 루이제 울리케의 대모중 한명이 바로 스웨덴의 여왕이었던 울리카 엘레노라였고 울리케라는 이름도 대모의 이름을 딴것이었죠. 그녀는 대모와 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돌프 프레데리크가 왕위계승자로 정해진후 그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하면서 이름도 스웨덴식으로 로비사 울라카가 되죠. 로비사 울리카는 스웨덴에서 매우 환영받았고, 후계자들을 낳으면서 더욱더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제군주국이었던 프로이센에서 성장한 그녀는 스웨덴의 의회정치를 이해할수 없었고, 의회가 남편에게 홀슈타인의 계승권을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조카를 며느리로 맞고 싶어했던 그녀의 바램과는 달리 덴마크의 소피아 마그달레나를 아들 구스타프의 신부로 맞이라하고 하자 의회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고합니다.

그후 그녀는 의회에 대항해서 왕의 권리를 강화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고합니다.

남편이 죽은후 아들 구스타프3세가 즉위했한후 그녀는 아들과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게 됩니다. 구스타프3세는 어머니의 권리를 제한했기때문이었죠. 그후 며느리인 소피아 마그달레나가 아들을 낳았을때, 그 아들이 왕의 자식인지 아닌지를 공식적으로 조사하게 해서 구스타프3세와 소피아 마그달레나를 충격에 빠뜨렸죠.

이일로 구스타프3세와 로비사 울리카는 영원히 등을 돌렸고, 구스타프3세는 어머니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요구했으며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평생 시어머니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한결같이 조카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했기때문에 두 며느리였던 소피아 마그달레나와 헤드비 엘리자벳에게 차갑게 대했다고 합니다.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냉랭하고 수줍음이 많다'라고 평가했고 헤드비 엘리자벳에게는 '경박하다'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의 로비사 울리카

 

아돌프 프레데리크의 아들이었던 구스타프3세는 의회에 의해 덴마크의 공주였던 소피아 마그달레나와 정략결혼을 합니다. 정략결혼이었던 둘은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구스타프3세는 자신의 부인에게 차갑게 대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스타프3세의 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는 며느리에게 냉랭하게 대했다고합니다.

 

 

 

스웨덴의 소피아 마그달레나 왕비

구스타프3세의 왕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소피아 마그달레나

Sofia Magdalena of Denmark and Norway

Queen consort of Sweden.

(Christiansborg Palace, Denmark, 3 July 1746 - Ulriksdal Palace, Sweden, 21 August 1813)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덴마크의 왕 프레데릭5세와 그의 왕비인 영국의 루이즈의 딸이었습니다. 루이즈는 영국의 조지2세와 그의 부인인 캐롤라인 왕비의 딸이었습니다.

소피아 마그달레나와 구스타프3세간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는데, 스웨덴 의회가 이를 주도했고 때문에 구스타프3세의 어머니 로비사 울리카는 이 결혼을 못마땅해했고 며느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소피아 마그달레나와 구스타프3세는 정략결혼이었기에 행복한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결혼후 9년동안 후계자가 없었기에 더욱더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구스타프3세는 동생인 칼을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헤드비 엘리자벳과 결혼시켜서 후계자를 얻길 바랬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혼한지 9년만에 후계자가 될 왕자를 얻게되죠.

하지만 이것은 도리어 스캔들로 발전했는데, 스톡홀름에서는 왕비가 낳은 아들이 사실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 국왕의 시종의 아들이고, 국왕과 왕비는 사실상 이혼했으며 왕비는 국왕의 시종과 재혼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후에 구스타프3세의 동생 칼은 어머니에게 '궁정에서 여자들이 아무남자나 잠자리를 한다'라고 말하면서 새로 태어난 후계자에 대한 소문을 전했고, 로비사 울리카는 이 문제를 정식으로 조사하도록합니다.

이것은 구스타프3세와 소피아 마그달레나 왕비에게 큰 충격이었고, 구스타프3세는 어머니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요구했고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다시는 시어머니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국왕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것은 국왕은 섹스에 관심이 없었고, 왕비는 순진한 처녀였기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왕의 시종이 둘에게 섹스에 대해 가르쳐야했다고 합니다.-0-;;;;;;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둘째아들이 태어나면서 남편과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둘째아들이 죽은후 둘은 별거에 들어가죠.

남편이 죽고 아들 구스타프4세 아돌프가 즉위한후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며느리인 바덴의 프레데리케에게 매우 잘해줬다고 합니다. 자신의 시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가 자신에게 차갑게 대했던것을 기억했기때문이었죠.

하지만 아들 구스타프4세 아돌프는 쿠데타로 쫓겨났고, 스위스로 가서 망명생활을 했죠. 그리고 왕위를 노리던 시동생 칼이 칼 13로 즉위하죠.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아들이 쫓겨난 뒤에도 죽을때가지 스웨덴 궁정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칼 14세 요한이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로 선출되어 스웨덴에 왔을때 그의 부인인 데지레 클라리에게 잘대해줬던 몇안되는 스웨덴 궁정사람중에 한명이었다고 합니다.

소피아 마그달레나에대해서는 '스웨덴 궁정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외로웠던 사람이다'라고 전해져온다고합니다.

 

구스타프4세 아돌프는 원래 예카테리나2세의 손녀이자 파벨1세의 딸이었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약혼하려했습니다. 예카테리나2세는 구스타프4세 아돌프와 손녀가 잘어울린다고 마음에 들어했으나 구스타프4세 아돌프의 생각은 달랐죠. 그는 알렉산드라 여대공이 신교로 개종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러시아쪽에서는 여대공의 개종을 반대했습니다. 결국 약혼발표날 구스타프4세 아돌프는 신교도가 아닌 왕비를 맞이할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도망갔고, 약혼식날 버려진 여대공과 여제는 충격을 받았죠. 이 일이 있은지 두달정도 지난후 여제는 사망합니다. ...일설에는 알렉산드라 여대공이 못생겨서 구스타프4세 아돌프가 도망갔다는 소리도있습니다. 후에 그는 악화된 러시아와의 관계를 만회하기위해 알렉산드르1세의 처제였던 바덴의 프레데리케와 결혼합니다.

 

 

 

 

스웨덴의 프레데리카 왕비

구스타프4세 아돌프의 왕비

바덴의 프레데리케

Friederike Dorothea Wilhelmina of Baden

 (12 March 1781 - 25 September 1826)

남편 구스타프4세 아돌프와 함께있는 모습입니다.

 

바덴의 프레데리케는 바덴의 후계자였던 카를 루드비히와 그의 부인인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에의 딸이었습니다. 프레데리케의 둘째언니인 루이제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1세와 결혼해서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황후가 되었죠. 큰언니인 카롤리네는 팔츠-츠바이브뤼켄의 공작인 막시밀리안 요제프와 결혼했는데 후에 그는 바이에른과 팔츠의 선제후가 되고, 바이에른왕국의 왕이되죠. 카롤리네의 딸들이 바로 유명한 바이에른의 쌍둥이 자매들(작센의 왕비들,프로이센의 왕비,오스트리아의 대공비가 되는 딸들)입니다.

알렉산드르1세의 동생이었던 알렉산드라 여대공과의 파혼때문에 러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알렉산드르1세의 처제이자 아름다웠던--;;바덴의 프레데리케를 왕비로 선택합니다

구스타프4세 아돌프와 결혼한 프레데리카 왕비는 처음에 스웨덴 궁정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고합니다. 그녀역시 시어머니처럼 수줍음이 많은 여성이었다고 합니다.게다가 스웨덴 궁정의 자유주의적 성향은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죠. 하지만 시어머니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프레데리카에게 잘대해주었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그녀도 왕비로써의입지를 굳혀갔습니다.

하지만 쿠데타로 남편 구스타프4세 아돌프는 스위스로 망명해야했고, 그녀역시 스웨덴에서 아이들과함께 추방당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왕비'가 아닐때 아이를 더 낳는것을 거부했고, 결국 구스타프4세 아돌프와 이혼했습니다. 하지만 비밀리에 전남편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고, 스웨덴에 남은 시어머니와 언제나 연락을 주고받았다고합니다.

그녀의 아들이었던 바사공 구스타프는 스웨덴 왕위계승자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프리데리카의 딸이었던 소피아는 프레데리카의 숙부가 되는 바덴의 대공가의 후계자인 레오폴드1세와 결혼합니다.(레오폴드1세는 귀천상혼으로 태어났지만, 바덴가의 남자후계자가 단절되자 후계자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소피아의 손녀인 바덴의 빅토리아는 스웨덴의 구스타프5세와 결혼했고, 이 결혼으로 홀슈타인-고토포프가의 왕위계승권역시 현 스웨덴왕가로 넘어가게됩니다.

 

구스타프4세 아돌프가 쫓겨난후, 스웨덴의 왕위는 구스타프4세 아돌프의 숙부인 칼 13세에게 갑니다. 칼13세의 왕비였던 헤드비 엘리자벳은 오래전에 결혼했지만 후계자를 얻는것에는 실패했고 결국 왕위계승자로 나폴레옹휘하 원수였던 베르나도트장군이 선출되죠.

 

 

 

 

스웨덴의 헤드비 엘리자벳 왕비

칼13세의 왕비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헤드비 엘리자벳

Hedwig Elizabeth Charlotte

(Swedish: Hedvig Elisabeth Charlotta; Eutin, 22 March 1759 – Stockholm, 20 June 1818)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헤드비 엘리자벳은 후에 홀슈타인-올덴부르크의 공작이 되는 프레데리크 아우구스트1세와 헤센-카셀의 울리카 빌헤미네 프레데리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프레데리크 아우구스트는 스웨덴의 왕이된 아돌프 프레데리크의 동생으로 칼 13세와 그녀는 사촌간이었죠.

15살에 칼왕자와 결혼했던 그녀는 '어린공작부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합니다. 무척이나 아름다웠고,활달한 성격으로 수줍음 많았던 동서인 소피아 마그달레나 왕비를 대신해서 궁정을 주도해나갔다고합니다. 하지만 늘 조카를 며느리로 맞고싶어했던 그녀의 시어머니 로비사 울리카는 헤드비 엘리자벳에대해서도 차갑게 대했고 그녀에 대해서 '경박하다'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헤드비 엘리자벳의 남편 칼 왕자는 부인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러워했지만 그외에는 부인에게 관심이없었다고합니다. 그리고 많은 정부를 두었죠. 이런 남편에대해 헤드비 엘리자벳역시 수많은 정부를 만드는것으로 대응했다고합니다. 그녀의 정부들중 한명이 마리앙투와네트와의 관계로 유명한 페르젠백작입니다. (...처음에 이 글을 읽고는 마리만 사랑한것이 아니었단말인가..를 외쳤습니다만....--;;;바람둥이였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뭐...최근에 5대 데본셔공작의 정부였다가 그의 부인이 되는 레이디 엘리자베스 포스터 역시 페르젠백작과 관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어도 그러려니...--;;;나중에 페르젠백작의 연인이었던분들에 대해서 정리좀 해봐야할듯해요..)

활달했던 그녀는 정치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지만, 남편과의 소원한 관계는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않게하죠. 칼왕자는 형이 죽은후 조카 구스타프4세 아돌프가 어릴때 섭정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스타프4세 아돌프가 쫓겨난후 칼13세가 즉위하게 되었을때, 국왕은 이미 정신이 명확하지 않았죠. 때문에 헤드비 엘리자벳은 정치를 주도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녀는 쫓겨난 구스타프4세 아돌프의 아들 구스타프 왕자를 왕위계승자로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페르젠이 사람들에게 살해당한후 베르나도트장군이 왕위계승자로 오죠.

헤드비 엘리자벳은 자신의 양아들의 카리스마에 감탄했고, 곧 그의 지지자가 됩니다. 하지만 양아들의 부인인 데지레 클라리에게는 매우 차갑게 대했다고 합니다. 이런 왕비의 영향때문에 스웨덴 궁정에서는 데지레 클라리에 대해 대부분 차갑게 대합니다. 실제로 왕비는 평민출신의 새 왕태자비에게 매우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데지레에 대한 외모의 혹평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왕비는 일기에 '왕태자비는 작고 아름답지도 않으며 매너있게 행동할줄도 모른다...'라고 쓸정도였다고 합니다.

 

자료& 그림출처

위키피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