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조카를 위한 역사이야기...스웨덴의 유셰니 공주

엘아라 2008. 9. 29. 01:19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지인의 아이를 위해서 글을 써준것이 있거든요...

요즘 블로그질할 글이 바닥나서..(사실 지운글을 도로 올리기 귀찮아서...ㅠ.ㅠ)

이글을 한번 올려봅니다.

 

이건 시리즈인데 그중 한편만 올립니다.^^* 계속 쓰고있긴한데..아하하..주제잡는것이 어렵더라구요.

게다가 초등학생인 여자아이를 위한 글이다보니 아무래도 스캔들도 빼야하고 좋은쪽으로만 좀 써야해서...

인물 선정이 좀 힘들더라구요. 아하하..

 

ㅎㅎㅎ 스웨덴의 에우에니 공주는 제가 처음으로 스웨덴어 사이트를 뒤져서 스웨덴어-영어사전으로 엄청 시간들여 번역한 첫번째 글이랍니다. 덕분에 스웨덴어에 이유없는 자신감도 생기고(물론 못읽습니다. 사전없으면 숫자랑 이름빼고는 알길이 없다죠.) 무대포로 스웨덴어 사이트에 막 들어가는 버릇을 만든 글이라죠. ㅎㅎㅎ (크헉..영어도 제대로 못하는구만..ㅠ.ㅠ)

 

 덧.... 아래에 "스카이블루"님께서 스웨덴어로는 유쉐니로 읽어야한다고 이야기해주셨답니다...(제대로 가르쳐주셔서 감사를...) 읽으시는 분들 ..ㅠ.ㅠ 일단  알아서 저렇게 생각해주세요....

 

 

스웨덴의 유셰니 공주

Princess Charlotta Eugénie (Eugenia) Augusta Amalia Albertina of Sweden

 

 

 

생존기간 : 1830-1889
타이틀:
Prinsessa av Sverige och Norge(Princess of Sweden and Norway)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공주

 

샤를로타 에우에니(에우에니아) 아우구스타 아말리아 알베르티나 는 1830년 4월 24일 스톡홀름 왕궁에서 30살이었던 왕태자 오스카르와 23살이었던 그의 아내 로히텐베르크의 요세피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에우에니의 두 오빠는 각각 칼 15세와 오스카르2세가 됩니다. 그녀가 14살6개월이 되던해 그녀의 아버지가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에우에니가 태어난 스톡홀름의 왕궁

데지레의 소설에 보면 호숫가에 있는 왕궁이라더니 진짜로 그렇네요..아하하

 

 

 

에우에니의 아버지

스웨덴의 오스카르1세

..개인적으로는 웃긴 수염의 왕..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손질할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을꺼라는 생각이..)

 

 

 

에우에니의 어머니

로이히텐베르크의 요세피네(대충 프랑스식으로는 조제핀)

스웨덴의 요세피나 왕비

초상화를 봐도 늘 아름다우신 모습밖에 없죠.

 

에우에니라는 이름은 외할아버지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외젠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외젠의 어머니는 나폴레옹의 부인이었던 조제핀 황후였죠. 세례명의 또다른 이름들중 아우구스타는 외할머니인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에서, 아말리아는 이모였던 브라질의 황후 아말리아에서, 알베르티나는 스웨덴의 홀슈타인-고토로프 왕가의 마지막 공주였던 소피아 알베르티나의 이름에서 따온것입니다. 

에우에니는 후에 자신의 어린시절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의 어린시절은 내 나이또래의 여자아이들과는 매우 달랐다. 나는 내 또래의 여자아이와 놀수없었고 심지어는 내 인형조차도 없었다. 나는 단지 내 오빠들과남동생과 함께 수많은 남자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야했다.'  왕실 아이들은 자주 툴르가른스 궁전에서 놀았고, 에우에니는 세오빠와 남동생중에서 그녀보다 세살 많았던 그녀의 오빠 구스타프를 제일 좋아했다고 합니다. 1835년 이후 에우에니는 어머니와 함께 여러곳을 여행했고, 1843년에는 부모와 함께 뮌헨에 있는 외할머니 아우구스테 공작부인을 방문합니다. 1845년 에우에니의 할아버지인 칼 14세 요한이 사망한 직후 에우에니는 독감을 앓게 됩니다. 이 독감은 에우에니의 건강을 무척이나 악화시켰고 평생 건강을 좋지 않게 만듭니다.

 

 

 

에우에니의 외할아버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외젠 드 보아르네(독일식으로는 오이겐이려나...)

 

 

 

 에우에니의 외할머니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아우구스테의 자매들은 오스트리아의 황후(카롤리네), 프로이센의 왕비(엘리자베트), 작센의 왕비들(아말리에, 마리아 안나), 오스트리아황제의 어머니(조피), 오스트리 황후의 어머니(루도비카)가 됩니다.

 

1846-1852년사이에 에우에니는 스웨덴의 공주로 화려한 사교계의 생활을 즐깁니다. 무도회에 참석해서 춤을 즐기는등의 즐거운 일들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에우에니가 결혼할 나이에 이르자, 독일과 덴마크의 왕자들이 에우에니의 결혼 상대후보가 됩니다. 하지만 에우에니 자신은 결혼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는 여러가지였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에우에니 자신이 '아름답고 독립적인 삶'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많이 좋지 않았던 건강 역시 결혼하는데 회의적으로 만드는데 한몫했습니다.  후에 스웨덴에서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갈수 있게 법률이 제정되었을때 그 첫번째 혜택을 받은 사람이 에우에니 공주였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은 에우에니

 

다른 스웨덴 왕실 여성들 처럼 에우에니 역시 신앙심이 매우 깊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종교음악을 작사작곡했으며, 또 여러 작곡가들의 후원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에우에니가 가장 좋아한 오빠였던 구스타프 역시 '가수왕자'라고 불릴정도로 작곡에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에우에니는 음악뿐만 아니라 그림과 조각에도 재능이 있었고, 아마추어 작가로도 활동했다고 합니다. 가장 유명한 조각 작품은 개와 아이가 함께 있는 'Kan du inte tala'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에우에니의 조각작품중 대표작인 'Kan du inte tala'

 

 

1852년 22살이 되던해 에우에니는 사랑하는 오빠 구스타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의 죽음은 에우에니 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요세피나 왕비에게도 큰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구스타프는 요세피나 왕비가 가장 의지한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죠.  또 오빠의 죽음에 이어 에우에니 자신도 중병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몇년동안의 투병후에 그녀는 건강이 더욱더 악화되어 평생동안 고통받았고 또 한쪽다리 역시 평생 쓰지 못하게 됩니다.

 

 

 

오빠 구스타프와 함께 있는 에우에니 공주

 

 1859년 1월에는 아버지 오스카르1세가 사망하고 오빠인 칼 15세가 즉위합니다. 

 

 

 

오스카르1세와 그 가족들

맨왼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에우에니입니다. 그옆이 아버지 오스카르1세 그옆이 에우에니의 조카이자 후에 덴마크 왕비가 되는 로비사 공주, 그옆이 에우에니의 어머니인 요세피나 왕비

뒷쪽왼쪽에서는 에우에니의 동생 아우구스트, 에우에니의 올케인 나사우의 소피아(후에 소피아 왕비, 오스카르2세의 부인), 오빠인 오스카르(후에 오스카르2세), 역시 오빠인 칼(후에 칼 15세), 올케인 네덜란드의 루이세(후에 로비사 왕비)

 

 

1861년 30대가 된 에우에니는 연약하고 몸이 가늘며 10대로 보일만큼 작고 연약했다고 합니다. 에우에니의 의사인 마그누스 후스는 고틀란드의 온화한 기후가 그녀의 건강에 무척이나 도움이 될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때문에 1860년대 에우에니는 고틀란드에 집을 마련해서 그곳에서 계속 머물렀다고 합니다. 1862년 에우에니가 고틀란드에 도착했을때 무척이나 건강이 악화된 상황이었지만 그곳의 집인 프리드헴에서 휴식을 취해서 건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겨울에는 스톨홀름에 있는 왕궁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에우에니의 집인 프리드헴에는 아름다운 정원의 공원이 조성되었고, 활발한 사회활동의 중심지가 됩니다. 

에우에니는 점차 자선 활동과 예술활동에 전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활동으로 얻은 수입 전체를 공적활동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1866년에는 프리드헴에 남자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집인 Fridtorp nr 1을 세우고 3년후인 1869년에는 여자아이들을 위한 어린이집인 Fridtorp nr 2를 세웠습니다. 같은해인 1896년 에우에니는 자신의 할머니(데지데리아왕비)의 보석을 팔아서 장기 요양이 필요한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 Gotlands Sjukhem를 세웠습니다.(sjukem이라는것은 요양원이라고합니다.)

 

 

중년의 에우에니 공주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 드러나죠.

 

1872년 9월 에우에니의 큰오빠인 칼 15세가 사망하고 다른 오빠인 오스카르가 오스카르2세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자선활동과 예술활동에 집중했던 에우에니의 삶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1873년 11월 그녀는 왕립 예술 학회를 설립했고 첫 명예회원이 되었습니다. 에우에니는 자신의 집에서 음악회를 열고는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75년에는 고틀란드의 어부들을 위한 연합모임도 구성했다고 합니다.1879년 그녀는 가난한 이들과 불치병자,고아들을 위한 단체의 회장이 되었고 또 아이들을 위한 단체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청소년을 위해 1882년에  Sundbyberg에 복지시설을 개원했으며 4년후에는  Eugeniahemmet라는 이름의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에우에니 공주는 다양한 방법으로 가난하고,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돕기 위한 방법을 계획했습니다. 또한 아우에니는 웁살라에 Fjellstedtska skolan라고 이름 붙여진 소년재활원(community home)을 설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1880년에 설립된 이곳은 아우에니 공주 소유의 집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자선 사업을 위해 에우에니 공주는 자신의 병 치료를 위한 꼭 필요한 재산을 제외한 많은 재산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재활원으로 활용된 자신의 집에서 에우에니는 모든 이들이 식사를 한후에야 자신도 '약간의 당근과 미지근한 물'로 저녁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에우에니의 오빠 오스카르2세는 에우에니가 할머니 데시데리아 왕비가 남겨준 유산의 나머지 모두를 자선사업에 기부할까봐 걱정했고, 어머니 요세피나의 유산을 모두 기부하는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할머니의 보석들은 이미 자선사업을 위해 다 팔았죠.) 

에우에니는 스톡홀름 왕궁에서 1889년 4월 23일 59살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여성들이 독립적인 삶을 산다는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여성의 재산은 여성에게 물려지는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들에게 계승되는것일만큼 재산권조차 미약했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에우에니는 자신이 바랬던 '독립적인 삶'을 살았고, 예술활동으로 수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전체를 자선사업에 헌신했죠. 이런 그녀의 삶과 행동은 당시보다 한세대나 앞선것이었습니다. 에우에니가 죽은후 고틀란드의 집은 오스카르2세의 아들이었던 오스카르 왕자가 상속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의 그 집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딸리는 스웨덴어실력으로 그곳 홈페이지를 가봤는데 아마도 호텔이 된듯합니다만.....대충눈치로 파악한거라..맞는지는..--;;;)

 

 

에우에니 공주의 음악작품들

 

피아노곡

 

  • Drottning Josephinas polonaise, polonäs (1854)
  • Louisa vals (1858)
  • La priere (1844)
  • Sorgmarsch, till minne av drottning Louise, död 1871
  • Tullgarns-galopp (1853)
  •  

    성악곡 

    • Andliga sånger till egen text (1878)
    • Novemberkvällen
    • Fiskaren (1850)
    • Romans vid piano (1859)
    • Sång Orden af Tibell (1863)
    • Augusta-dagen (1865)

     

    자료& 그림출처

    1.스웨덴 역사 사이트 (스웨덴어)

    http://www.historiesajten.se/ 

    2. 위키피디어중 Princess Eugenie of Sweden (독일어, 스웨덴어,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