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스웨덴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구스타프6세 아돌프의 부인)

엘아라 2008. 7. 28. 15:42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맘상해서 역사이야기를 다 삭제했는데...--;;;;;;

우연히 신문기사를 봤는데 서봉총이 있는 노동동,노서동 고분군에 한국-스웨덴 우호 기념 공원이던가가 생긴다고 하네요.

구스타프6세 아돌프이 기념관도 생기고 그런다고 하니.....

늘 허전했던 그곳이 예쁘게 단장된다는 것에 기쁜 마음에 루이즈 왕비에 대한 글을 다시 올리기로 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왕족인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는 스웨덴의 구스타프6세 아돌프의 두번째 부인입니다.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

전 바텐베르크의 루이즈 공녀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왕비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은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던 헤센의 빅토리아와 그녀의 남편인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태어날때는 HSH princess Louise of Battenberg였습니다만 1차대전때 그녀의가문 전체가 영국 귀족으로 성을 바꿀때 그녀도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이 됩니다.

 

루이즈의 어머니인 헤센의 빅토리아는  헤센의 대공인 루드비히4세와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딸인 영국의 앨리스 공주의 장녀입니다.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는 헤센의 알렉산더와 바텐베르크공비인 줄리 폰 후케의 장남입니다. 헤센의 알렉산더의 여동생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2세의 부인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입니다.(루드비히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3세는 사촌간입니다. )

바텐베르크공비와 헤센의 알렉산더는 러시아궁정에서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귀천상혼했습니다.

 

루이즈의 부모는 오촌관계로 루이즈의 아버지인 루드비히와 루이즈의 외할아버지인 루드비히4세는 사촌간입니다.

 

루이즈의 아버지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

후에 1대 밀포드헤븐후작 루이스 마운트배튼경

 

루이즈의 어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대공녀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공비

후에 밀포드헤븐 후작부인 빅토리아

(남편보다 신분이 더 높았던 빅토리아는 결혼후 언제나 자신의 신분이 남편의 신분에 맞추어불리길 바랬다고 합니다. 때문에 가문의 성을 바꿀때도 그녀 자신은 Princess칭호를 유지할수 있었지만 거절하고 남편의 신분에 맞추어 후작부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루이즈의 외가쪽 친척으로는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엘라) 대공비, 프로이센의 이레네 왕자비,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니콜라이2세의 부인) 이 이모들이었습니다. 외삼촌은 헤센의 마지막 대공이었던 에른스트 루드비히(애칭 에르니)입니다.

 

이모였던 엘라 대공비와 그 남편 세르게이 대공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와 러시아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역시 루이즈의 이모였던 알릭스와 이모부인 니콜라이2세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러시아의 니콜라이2세

  

 

루이즈의 친가쪽 친척으로는 고모인 마리 에르바흐가 있습니다. 그녀는 에르바흐 백작과 결혼했지만 헤센대공가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게 princess, prince칭호를 줘서 에르바흐공비가 됩니다.

숙부들로는 불가리아의 통치자였다가 반 러시아 정책으로 불러났던 알렉산더, 빅토리아여왕의 막내딸인 베아트리스공주와 결혼한 하인리히 모리츠(헨리), 몬테니그로의 안나(언니들이 러시아 대공비, 이탈리아 왕비등이었던)와 결혼한 프란츠가 있습니다.

루이즈의 숙부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의 남편

스페인의 에나 왕비의 아버지

 

루이즈의 형제들로는 언니는 앨리스 왕자비(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의 부인으로 현 영국여왕의 남편인 필립공의 어머니), 2대 밀포드헤븐후작이 되는 조지 마운트배튼경(바텐베르크의 조지), 버마백작이자 영국해군참모사령관을 지낸 루이스 마운트배튼경(바텐베르크의 루이스,딕키)이 있습니다.

 

루이즈의 동생

바텐베르크의 루이스

루이스 마운트 배튼경

후에 버마백작 루이스 마운트배튼경

 

Lady Louise Alexandra Marie Irene Mountbatten (13 July 1889 – 7 March 1965), Queen Louise of Sweden (1950-65), was the second wife of King Gustaf VI Adolf of Sweden

 

루이즈의 언니였던 앨리스가 3살이 될무렵 빅토리아 여왕은  앨리스의 어머니이자 여왕의 외손녀인 바텐베르크공비 빅토리아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압력을 넣습니다. 이유는 앨리스가 3살이나 되었는데도 같이 놀 동생 하나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여왕의 압력으로 빅토리아는 아이를 가집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루이즈죠. 하지만 루이즈는 조산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루이즈가 태어났을때 어머니 빅토리아는 앨리스와는 달리 아이가 예쁘지도 순하지도 않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특히 코가 너무크대나..)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닮았다고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어릴때부터 예쁘지 않아서 별명이 "shrimp"였는데 어린시절 내내 이별명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모였던 독일의 프리드리히 황후는 루이즈에 대해서 "매우 예쁘고 너무나 귀엽게 말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이즈는 너무나 예쁜 아이였던 언니 앨리스와 비교당하면서 살았고, 때문에 자신감없는 성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언니를 질투하기 보다는 예쁜 언니가 언젠가는 왕비가 될꺼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

 

어린시절부터 예뻤던 루이즈의 언니 앨리스

 

루이즈의 부모인 빅토리아와 루이스는 일년중 반정도는 독일에서 살았고 나머지 반정도는 영국에서 살았습니다. 게다가 루이스가 당시 전략적 요충지였던 몰타섬으로 발령날때면 가족 모두가 그곳으로옮겨가 살았죠. 독일에 있을때는 독일의 수많은 친척들을 방문했고, 영국에 있을때는 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을 방문해서 사촌들인 베아트리스 공주의 아이들과 놀며 지냈습니다. 

루이즈의 어린시절은 헤센의 빅토리아를 죽은 딸 앨리스 대신으로 여겼던 빅토리아 여왕의 영향력아래 평화로운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빅토리아 여왕은 바텐베르크의 루이스를 무척이나 좋아했죠.(빅토리아 여왕은 헤센-다름슈타트 가문 전체를 좋아했다고합니다. 때문에 헤센대공가의 분가였던 바텐베르크가문도 좋아하셨죠. 특히 루이스의 동생이자 베아트리스 공주와 결혼했던 헨리는 빅토리아여왕이 가장 의지한 사위였다고합니다. )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과 곧이은 언니 앨리스의 결혼은 루이즈의 어린시절을 끝내게 만듭니다.

그녀의 부모는 큰딸 앨리스가 너무나 일찍 시집간것에 대해서 매우 아쉬워하면서 루이즈가 곁에 있는데 위안을 삼았다고 합니다. 루이즈는 부모곁에 있으면서 친척들을 방문하는 삶을 계속 살죠.

  

1907년의 루이즈

드 라즐로 작품

(출처가 어디드라..기억이..ㅠ.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내 모든 독일계 왕족들은 독일식의 성을 바꾸도록 요구 받습니다.이것은 반 독일 감정 때문이었죠. 조지5세는 독일계인 그의 성부터 윈저로 바꿉니다. 그리고 그의 독일계친척들에게 성을 바꾸도록 요구합니다. 영국 내에 있던 독일계 왕족들은 메리 왕비의 친정이었던 테크 공작가, 베아트리스 공주의 아이들과 루드비히의 가족들이었던 바텐베르크가,헬레나 공주의 남편과 아이들이었던 홀슈타인가등이있었죠. 테크가와 바텐베르크가문은 성을 바꿉니다.헬레나 공주와 그녀의 남편은 성을 버리고 그냥 The princess,prince가 되죠. 그에 따라 루이즈의 아버지는 밀포드 헤븐 후작 루이스 마운트배튼이 되고 그녀의 어머니는 밀포드 헤븐 후작부인 빅토리아 마운트배튼이 됩니다. 그녀도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이 되고 동생들도 메디나의 백작 조지 마운트배튼과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이 되죠.(그녀의 사촌이자 베아트리스 공주의 아이들도 마운트배튼이라는 성을 사용합니다. 독일에 남아있던 친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운트배튼으로 성을 바꾼듯..)

 

 

1차대전당시 루이즈는 프랑스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2년간 일합니다. 루이즈의 외할머니였던 앨리스 대공비가 그랬고 이모인 엘라대공비가 그랬고 그녀의언니인 앨리스 왕자비가 그랬듯이 그녀도 전쟁중에 부상당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한것이죠. 이때 루이즈는 역시 같은 병원에서 간호일을 하던 한 젊은 화가를 만납니다. 스코틀랜드인이었던 그의 이름은 알렉산더 스튜어트-힐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왕립 미술학교를 다녔던 재능있는 예술가였습니다. 루이즈는 그와 친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1917년 그녀는 그와 약혼을 합니다.

 

루이즈의 결혼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일먼저 알려진 이야기는 앨리스 왕자비가 도움을준 루이즈 왕비의 전기인 Lady Louise Mountbatten : Queen of sweden에 언급된것으로 포르투갈의 마누엘2세가 에드워드7세를 통해서 루이즈에게 청혼을 했다는것입니다. 하지만 루이즈는 그 청혼을 거절했고 에드워드7세가 루이즈의 부모를 통해 압력을 넣자 루이즈는 자신은 '왕이나 홀아비'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것이라면서 거절했다는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약간 작위적인 스토리인듯한것이 루이즈는 후에 왕이면서 홀아비인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0-)

두번째는 1912년 루이즈가 언니 앨리스 왕자비를 만나러 그리스를 방문했을때 언니 앨리스 왕자비가 그녀의 시동생인 그리스의 크리스토포로스 왕자를 루이즈에게 소개 시켜줬다는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앞에서 언급한 전기에는 두 가문의 경제적 사정으로 둘의 결혼은 없었던 이야기로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루이즈 왕비의 전기중 스웨덴어판에만 나오는 이야기로 영어판에는 구스타프6세 아돌프의 요청으로 삭제되었다고합니다. 참고로 후에 크리스토포로스 왕자는 미국의 부자 과부였던 낸시 리즈와 결혼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루이즈가 스튜어트-힐과 약혼했을때 언니 앨리스가  외숙모에게 보낸 편지에 언급되어 있습니다.1차 세계대전전에 루이즈는 약혼할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루이즈와 잘 어울리는 남자였고 부모님도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이즈와 약혼하기 직전에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그가 누구인지는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문의 어떤 다른 이야기에도 언급이 없었다고 하네요. .

 

하지만 스튜어트-힐과의 약혼은 가족들이 봤을때는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가 재능있는 화가였다고 해도 가족들이 보기에는 그는 가난했고 괴상했고 결혼적합하지 않은 남자였기때문입니다.또한 가족들은 그가 루이즈를 행복하게 해줄지 의문이었습니다.루이즈가 자신의 행복을 확신한다고 해도말이었습니다. 루이즈의 약혼은 일단 공표하지 않고 가족들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1918년까지 약혼이 지속되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루이즈에게 그녀의 약혼자가 동성연애자이기 때문에 결혼할수 없을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당시 순진한 왕족-귀족아가씨였던 루이즈는 동성연애라는 것자체를 알지 못했고 또 그런일이 일어나고 있다는것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동성연애라는것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했다고합니다.--;;;; 참난감하셨을듯...) 결국 루이즈는 그와 파혼하게 됩니다.

 

루이즈와 그녀의 가족들은 1차대전동안 러시아 친척들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러시아 황후였던 알렉산드라 황후는 그녀의 이모였습니다. 그리고 세르게이 대공의 아내였던 엘라대공비도 그녀의 이모였죠.  특히 어머니 빅토리아의 충격은 말할수 없이 컸습니다. 동생둘이 살해당했으니 말입니다. 짜르 일가의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엘라대공비의 시신을 찾을수 있었죠. 빅토리아는 후에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엘라의 시신을 예루살렘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교회에 묻습니다.  빈민구제에 힘쓰고 종교에 심취했고 남편이 죽은후 러시아 정교회 수녀가 되었던 엘라 대공비는 후에 러시아 정교회 성녀로 시성받습니다.(다른 황실가족전체도 성인으로 시성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정신적 충격은 빅토리아의 일생에 남았습니다. 빅토리아는 1차대전이 끝난후 동생인 헤센의 대공 에른스트 루드비히를 만나는것을 주저했는데 그 이유가 동생을 만나면 살해당한 동생들이야기가 나올것이 너무나 두려워서였다고합니다. 빅토리아는 동생들 생각을 잊기 위해 매일 몇시간씩 정원일을 했다고합니다.

 

1921년 그녀의 아버지인 1대 밀포드 헤븐 후작인 루이즈 마운트배튼이 사망합니다. 가족모두에겐 슬픈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1차 대전동안 반 독일 정서때문에 평생 정열을 쏟았던 해군에서 한동안 은퇴한후 이제막 다시 해군에서 일을 다시시작하려고하있었기에 더욱더 가슴아픈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후 루이즈는 어머니 빅토리아와 켄징턴궁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것을 허락받습니다. 켄징턴궁으로 이사온후 어머니 빅토리아는 남편이 없는 새로운 장소이지만 다른 불행한 미망인들보다 나은 자신의 처지에 감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이도 없이 남편이 살해당했던 동생 엘라를 생각했을껍니다.

 

얼마후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하는 여인(후에 안나 앤더슨)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루이즈의 어머니인 빅토리아는 그녀가 가짜라고 단정합니다. 그리고 앨리스와 루이즈, 디키등 다른 가족들도 그녀가 가짜라고 주장하죠.(빅토리아는 그녀가 아나스타샤가 아닌 이유가 귀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나스타샤의 귀는 빅토리아의 숙부였던 헤세의 하인리히와 똑같이 생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빅토리아는 아나스타샤를 볼때마다 그녀의 귀를 유심히 봤었다고 하네요.하지만 안나 핸더슨의 귀는 다르게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전 본 다큐에서는 안나앤더슨의 귀가 아나스타샤의 귀와 닮았다고 나오더군요. 누구말이 맞는건지...쿨럭)

 

1920년대의 루이즈의 언니 앨리스 왕자비

은혼식 사진이던가를 보면 딸들보다 더 예쁜 앨리스 왕자비의 모습이 있죠.

드라즐로 그림, 필립공의 개인소장품

(카피라이트 by  필립공)

 

 

그리스의 불안한 정세는 언니 앨리스의 신상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형부인 안드레아는 그리스의 쿠데타로 죽을뻔하고 간신히 구출되어 망명합니다. 1차대전중 이미 망명 경험이 있었던 앨리스의 가족들은 두번째 망명으로 더욱더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긴장 상황과 친척들의 살해, 무기력한 삶은 루이즈의 언니 앨리스 왕자비의 정신을 서서히 좀먹어 들어갑니다. 

 

언니 앨리스는 자신의 딸들인 마르가리타와 테오도라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영국에 보내서 남편감을 물색하게 합니다. 1923년부터 루이즈의 두 조카는 캔징턴궁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사교계의 파티등을 참석하면서 즐거워하고 여러 왕족들을 만나죠. 루이즈는 조카들이 남편감을 찾는데 보호자로써 따라다니는것을 즐겼고, 또 누가 조카들의 남편이 될지 고심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한남자가 청혼을 합니다.

그는 3년전 아내를 잃은 스웨덴의 왕태자였던 구스타프였습니다. 루이즈는 어머니의 사촌인  코넛의 마거릿의 남편이었던 구스타프 왕태자와는 만나서 인사하는 정도로 밖에 알지 못하는 사이였습니다. 1923년 구스타프는 루이즈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켄징턴 궁으로 루이즈와 그녀의 어머니 빅토리아 와 함께 차를 마시러 몇번 더 방문하게 됩니다. 그 외에는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루이즈는 그가 굉장히 멋있고 둘이 같이 있으면 편안하다는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루이즈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드라이브를 간 어느날 그는 모두들 그가 재혼하길 바라고 그에 맞는 사람이 루이즈 라면서 청혼을 합니다.

 

루이즈의 청혼자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태자

후에 스웨덴의 구스타프6세 아돌프

 

 

그의 청혼을 받은 루이즈는 수많은 어려움을 걱정합니다.(루이즈의 표현으로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니 노처녀가 청혼을 받았는데 것도 왕이될남자한테...루이즈가 소심한 성격이라는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녀의 나이는 34살(우리나라 나이로 36살)로 결혼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죠. 그리고 그와 결혼한다면 영국을 떠나 스웨덴으로 가서 살아야하는데 낯선나라로 가야한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위계승자였기에 수많은 의무가 따를것이고 그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그리고 그는 다섯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아이들과 잘 지낼수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루이즈의 구혼자인 스웨덴의 왕태자 구스타프는 1882년에 태어났고 1905년에 그의 첫번째 아내였던 코넛공작의 딸인 마거릿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1920년 6번째 임신중 사망하죠. 그는 학자기질이 다분했습니다. 어린시절 중국 예술품에 관심을 가진 이후 중국예술에 관해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고학자이자 예술품 전문가였습니다.(그는 일제 시대때에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일본정부는 그를 위해 특별히 신라고분 발굴에 참여시켰다고 합니다. 그가 발굴에 참여한 고분이 바로 서봉총입니다.) 또한 그는 뛰어난 요리사에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일을 즐겁게 했죠.(연회를 개최하거나 땅을 파는 일도 똑같이 말입니다.^^)그리고 그는 절대로 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스타프6세 아돌프와 그의 첫번째 부인인 코넛의 마거릿

그리고 둘의 아이들

(넷째인 벨틸이 태어났을때)

 

 

루이즈의 걱정과는 달리 가족들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합니다. 특히 딸이 노처녀로 늙을것을 걱정하던 어머니 빅토리아는  소심하지만 이타적 성격의 루이즈에게는 구스타프가 적당한 신랑감이라고 생각하고 구스타프에게 딸과 더 자주 만나라고 부추깁니다. 루이즈는 깊이 생각하고는 결국 그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루이즈와 구스타프의 결혼은 다른 문제들에 부딪힙니다.

구스타프가 그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재혼소식을 바로 말하지 못합니다. 특히 죽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집착하던 그의 딸 잉그리드에게는 더욱더 말을 못합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 조지5세의 찬성이 필요했습니다. 왜냐면 루이즈가 영국왕실의 일원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되었는데 그것은 구스타프의 왕위계승권리와 연관해서 복잡하게 돌아갔죠. (결국 결혼 협정서가 체결되었고 조지5세는 루이즈가 왕실가족일원임을 명확히 해서 구스타프의 왕위계승에 지장이 없도록하죠.)

 

구스타프의 가족들과 루이즈의 가족들이 서로를 알아야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두가족은 스위스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그곳은 루이즈의 언니 앨리스가 망명생활을 하던곳이죠.

구스타프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로 옵니다. 루이즈는 구스타프의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됩니다만 구스타프의 딸이었던 잉리드는 루이즈를 어색하게 대하죠. 그리고 아버지의 재혼에 매우 슬퍼하고 화를 냅니다.

 

1923년 11월 3일 런던에서 구스타프와 루이즈는 결혼합니다. 그리고 스웨덴으로 가게 됩니다. 스웨덴에서 루이즈는 우아한 매너와 말솜씨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됩니다. 1925년 그녀는 임신합니다만 여자아이를 사산하게 됩니다. 루이즈는 다른 아이가 생기길 기대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지만 아이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합니다.그래서 구스타프의 아이들과도 잘 지내려했고 손자손녀들을 무척좋아했다고 합니다.

 

루이즈와 구스타프6세 아돌프

 

루이즈의 언니인 앨리스 왕자비는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증세는 두번의 망명생활을 통한 무기력한 삶에서 오는 정신적 문제였죠.(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심한 우울증으로 환청까지 들리는 상태...인듯합니다만 워낙 전문용어가 난무하는지라..앨리스 왕자비의 동서였던 마리 보나파르트가 요양원을 추천했죠.) 앨리스는 요양원으로 강제로 보내졌고, 루이즈는 형부와 조카들을 걱정했습니다. 언니가 요양원에 들어간 일년반사이 앨리스의 딸들 모두가 결혼합니다. 아프기때문에 딸들의 결혼식에 갈수 없는 언니를 대신해 루이즈는 조카들 모두의 결혼식에 참석합니다.

언니 앨리스 왕자비가 아프고나서는 언니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루이즈는 언니를 외삼촌의 장례식에서 처음 만납니다. 하지만 곧 조카의 비극적 죽음이 일어나죠. 앨리스의 딸이었던 세실과 그녀의 남편이자 앨리스와 루이즈의 사촌이었던 헤센의 게오르그 도나투스 가족들이 비행기 사고로 모두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죠. 병에서 막 회복되던 앨리스는 딸의 죽음을 잘 극복했지만, 루이즈가 있는 스웨덴에서 한동안 머물렀다고 합니다. 루이즈에게도 조카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고, 앨리스와 루이즈는 서로를 의지하며 한동안 지냈다고 합니다. 

 

1938년 그녀의 어머니 빅토리아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 모두가 런던에 모였습니다만 그녀의 동생이었던 조지가 빅토리아의 생일 3일 후에 사망합니다. 모두에게는 큰 슬픔이었죠.

 

1947년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녀의 조카이자 언니 앨리스의 아들이었던 필립왕자는 자신의 그리스와 덴마크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영국 시민인 필립 마운트배튼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혼녀이자 조지6세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을 하죠. 이때 많은 친척들이 참석하게 됩니다만 독일 왕족과 결혼했던 필립의 누나들은 아직 반독일 감정때문에 결혼식에 참석을 못합니다. 물론 루이즈는 그녀의 남편과 함께 참석합니다.

 

1950년 그녀의 어머니 빅토리아가 필립과 엘리자베스 공주의 딸인 앤공주가 태어난직후 사망합니다. 빅토리아가 죽은 몇주후 그녀의 시아버지이자 스웨덴 국왕이었던 구스타프5세가 사망하고 그녀의 남편이 구스타프6세 아돌프로 즉위합니다. 그에 따라 루이즈도 스웨덴 왕비가 되죠.루이즈는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만 약간 어색합도 느낍니다.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이 폐하라고 불리우는데 아직 익숙하지 않다고 적습니다. 때문에 마운트배튼가에서는 몇몇의 일화가 전해져온다고 합니다. 그중 한가지는  그녀가 런던에 와서 쇼핑을 하러 가는데 길을 가로질러 가다가 차에 부딪힐뻔 했는데 아무도 그녀를 못 알아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스웨덴 왕비라는 말을 하는것이 어색해서 핸드백에서 "나는 스웨덴 왕비입니다"라는 말이 적힌 카드를 꺼내서 모두에게 보여줬다고 합니다.^^;;

 

1960년대의 루이즈 왕비

(브리간사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쓰고계시는군요)

 

구스타프6세 아돌프와 루이즈 왕비는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다고 합니다. 둘의 생활은 매우 재미있었는데 이를테면 스톡홀름에서 호위하는 사람없이 시내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고 그러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왕은 모자를 들어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또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웨덴에 방문했을때 스웨덴 왕과 왕비사이에 앉았는데 구스타프가 루이즈에게 창문좀 열어달라고 하자 루이즈가 "Please라고 말하면 열께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왕궁주변을 산책중인 구스타프6세 아돌프와 루이즈 왕비

 

경호원없이 산책중인 국왕부부

구스타프6세 아돌프는 저렇게 지나가는 사람이 인사를 하면 모자를 들어 답례를 했다고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많은 친척들이 죽어갔습니다.그리고 루이즈 그녀의 건강도 나빠졌죠.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건강한 편이라 루이즈는 언제나 그것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1964년 그리스의 파울로스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었던 콘스탄티노스가 즉위했습니다. 새로운 그리스의 왕은 구스타프6세 아돌프의 외손녀이자 덴마크 공주인 앤-마리를 사랑했었죠.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으나 둘은 결혼을 합니다. 구스타프와 루이즈는 외손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길 원했지만 루이즈의 건강때문에 구스타프 혼자서 흰 해군 제복을 입고 참석하죠.

 

이결혼식전에 루이즈는 원하던 일을 한가지 합니다. 그것은 그녀의 이모였던 엘라대공비에 대한 전기 출판하는 것이었는데 훌륭한 전기 작가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하는 모든것을 책에 쓰게 하죠. 1964년에 출판된 엘라대공비의 전기는 매우 훌륭한 작품중 하나로 루이즈는 그책을 자신이 쓴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자랑스러워하죠.

 

하지만 1964년 말에 그녀는 심장마비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1965년 2월까지 병원에 입원해있었죠. 그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친척들은 그녀곁에 모입니다. 그리고 3월 7일 그녀는 숨을 거둡니다.

 

그녀가 죽은후 그녀의 언니였던 앨리스 왕자비는 그리스를떠나 영국으로 오게 됩니다. 그녀는 동생 루이즈의 전기를 쓰는데 도움을 주죠. 그래서 나온 책이 1968년에 출판된 Louise Mountbatten, Queen of Sweden 입니다.

 

 

덧붙이는 말..

루이즈 왕비에 대한 자료는 인터넷에서 많이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 최근에야 위키피디어 영문판에 있던 짧막한 글이 많이 길어졌더군요. 하지만 내용을 찾아보니 제가 참조한 책에서 많이 나오네요.^^

제가 참조한 책은 그녀의 언니인 앨리스 왕자비에 대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스웨덴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남편의 아이들과는 잘 지냈는지에대해서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다음 목표는1968년에 나온 루이즈 왕비의 전기와 스웨덴어로 된 스웨덴 왕비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는거랍니다. 스웨덴어를 모르기때문에 아마도 스웨덴어로 된 글을 읽는것은 엄청난 시간이 들겠지만 언젠가는 읽을수 있겠죠.

 

 

참고1.

구스타프6세 아돌프의 고명딸 잉리드 공주와의 관계...

스웨덴의 공주이자 후에 덴마크 왕비가 되는 잉리드는 아버지의 재혼을 이해할수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의 어머니가 죽었을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10살(우리나라나이로 12살)이었지만 아버지가 재혼할때는 13살(우리나라 나이로 15살)정도로 사춘기 소녀였습니다.

엄마가 죽은지 겨우 3년 밖에 안되었는데 아버지가 재혼한것이 충격일수 있죠.

루이즈가 결혼해서 스웨덴으로 갔을때 잉리드 공주는 자신의 방에 친어머니 사진으로 도배를 해놓고 루이즈를 근접 못하게했다고 합니다. 또 루이즈와 친해질 시간도 없이 잉리드는 영국으로 가서 외가인 코넛공작가에 머물면서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잉리드는 루이즈를 이해할 시간이 없었죠.

잉리드는  루이즈를 부를때는 항상 새어머니(stepmother)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덴마크의 왕태자와 결혼한뒤에도 자신의 딸들에게 할머니는 루이즈 왕비가 아니라 마거릿 왕태자비라고 늘 말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잉리드 공주는  고명딸이었기에 아버지의 재혼에 더욱더 상처를 받았을수도 있죠.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아끼고 무척이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갔다고 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불행했다고 생각해서 더 행복한 가정을 가질려고 노력했을수도 있죠.(....알버트공처럼 말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후에 잉리드는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이해했을듯합니다. 두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는것을 알수 있었을테니까요. 하지만 잉리드가 이해했다고 해도 그땐 이미 그녀 자신이 덴마크 왕비로써의 의무가 있었고, 또 자신의 가족들이 있었기에 많이 드러낼수 없었지 않을까합니다.

실제로 루이즈 왕비가 죽었을때 동생인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이 그 소식을 구스타프6세 아돌프와 잉리드 왕비에게서 연락받았다고 합니다. 루이즈의 임종시에 잉리드 왕비가 곁에 있을정도면 관계가 많이 좋아졌던것이 아닐까요...^^*

 

 

참고2. 서봉총

서봉총은 일제시대때 발굴된 무덤입니다. 이 고분에서 바로 금관이 출토되죠. 우리나라 고분에서 순금관이 나온것은 몇개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신라시대인 경우에는 특정시대 이전으로 한정됩니다. 하여튼 중요한 고분이라고 하던데...사실 황남대총에만 열을 올린관계로 나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아하하

하여튼 당시 일본 정부는 아시아를 방문중이던 스웨덴의 왕태자인 구스타프 아돌프를 고분 발굴에 참여를 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때가 1926년으로 그는 아내였던 루이즈 왕태자비와 같이 왔었다고 합니다.^^ 이 고분의 이름중 "서"는 스웨덴의 한자어인 서전에서 따온것으로 구스타프의 발굴 참여를 기념해서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봉"이라는 이름은 봉황이 있는 금관이 나왔다고 해서 봉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봉총 발굴에 구스타프6세 아돌프가 참여한것은 일제의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이야기가 쬐금 씁쓸한 이야기죠.

 

자료출처

1. Alice: Princess Andrew of Greece (2001, Hugo Vickers)

2.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피디어

Alice:Princess Andrew of Greece(2001, Hugo Vickers)